바보 온달, 그는 진짜 바보였나

2022. 7. 8. 10:0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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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

온달은 설화의 주인공이자 역사 속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보라고 무시당했는데 당시 고구려의 평원왕은 울기만 하는 딸 평강공주에게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꾸짖습니다. 시집갈 나이가 된 평강공주는 귀한 가문에게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 어렸을 적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온달에게 찾아가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청합니다. 눈먼 노모는 귀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고 온달은 ‘귀신이면 썩 물러가라’라 하면서 공주에게서 도망갔습니다. 평강공주는 날밤을 새며 간청한 끝에 온달과 평강공주는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주는 가져온 보석, 팔찌를 팔아 논과 밭을 사고 노비를 두고 우마와 가구도 장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온달은 공주의 말에 따라 무예를 익혀 왕이 참관한 사냥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처음엔 평원왕은 온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온달은 후주의 군대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며 왕의 부마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3년 뒤 신라와의 싸움에 자원하여 “계립현 문경과 죽령이서의 땅을 탈환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렇게 출정한 전투에서 온달은 전사하게 되었고 그 곳이 바로 아단산성이었습니다. 신라를 물리치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장군의 전사소식에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과 공주는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영구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공주는 장군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관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죽고 산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 마음놓고 돌아가소서’
이 말에 관은 움직였고 장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때가 서기 590년의 일이었습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남자버전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온달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온달의 이야기의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온달이야기로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온달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온달 설화를 통해 고구려는 개인이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평강공주가 팔찌를 팔아 돈을 마련한 것을 보면 고구려사회는 가난했던 자도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면 큰 집을 짓고 노비를 거느릴 수 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무를 중요시하는 사회였으며 이를 통해 신분이 낮더라도 출세가 가능한 사회였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게다가 왕이 사냥대회에서 1등한 그를 평강공주의 남편이라고 알아보지 못한 것을 보면 빽 없이 출세가 가능했던 즉,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드물지만 가능한 나라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이는 온달설화를 통해 유추해 본 고구려의 모습일 뿐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드는 의문점은 온달이 정말 바보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궁궐에 사는 임금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소문난 바보라면 과연 공주의 말에 따라 무예를 익힌다 한들 당대 최고의 무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달을 수식하는 바보는 진짜 바보가 아닌 몰락한 귀족출신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 온달이 처음 받은 관직이 대형이었는데 이는 고구려에서 7번째 높은 관직입니다. 따라서 온달은 귀족출신으로 아마 귄력 싸움에서 밀려난 국내성파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6세기경 고구려는 중국과 신라를 견제해야 되는 상황에서 국내정치세력의 힘을 모아야 했고 국내성파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온달설화라는 이야기를 탄생시킨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온달은 본래 낮은 신분이었으나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고 우경이 보급되는 시대 변화 속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부유층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를 축적한 이들이 정치계로 진출할 수 있었는데 온달설화는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담아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혹은 온달이 다문화출신 자녀라는 설도 제기되었는데요. 아마 그의 우스꽝스런 외모는 이국적인 그의 용모를 묘사한 것이며 그가 봉성 온씨의 시조라는 것은 이전까지 온씨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가 고구려로 이주해온 외국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차산성의 흔적


두 번째 드는 의문점은 그는 어찌하여 신라군과 결전을 벌였으며 그가 전사한 아단성은 지금의 서울 아차산성이냐, 아니면 온달산성이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생각해야겠습니다. 당시는 고구려가 강성했던 5세기가 지난 시점으로 수나라가 중국분열시기를 통일하고 신라가 강성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 자신을 후원해주던 평원왕이 죽자 새로 즉위한 영양왕에게 신임을 얻고자 참전을 자청한 게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 출전을 결심했고 수나라보다는 신라를 상대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판단했기 때문에 온달은 신라와의 결전을 다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흥왕 시기를 거친 신라는 강성해져 있었고 온달은 신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그가 전사한 곳 아단산성은 아차산성일까요. 온달산성일까요. 아차산성이 아단성일 것이라는 주장에는 아차산성이 고구려와 신라가 자주 부딪힌 곳이 한강하류인데 아차산성은 바로 그 곳에 위치합니다. 하지만 아차성(阿且城)과 아단성(阿旦城)은 글자가 다른데 오히려 이러한 것이 아차성이 아단성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아마 旦이 且로 바꼈을 것이라는 것인데 의도적이든 착오가 있든 지명이 아단성이 아차성이 변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위치한 온달산성 또한 아단성으로 많은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이 곳이 고구려 때 지명이 을아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달이 출정을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했는데 온달산성이 계립령과 죽령이 가깝고 또한 이 지역에 온달관련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달산성이 위치한 영춘에서 전해지는 온달관련 이야기는 18세기부터 갑자기 등장합니다. 옛 지명이 을아단이었던 점을 이용하여 온달의 이야기를 이 지역의 지명에 인위적으로 결합시키고 옛 성의 이름마저 온달성으로 바꾸었을 것이라는 점도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온달산성이 위치한 단양에서 온달의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실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가 한강하류를 차지한 상황에서 한강 상류인 영춘 지역에 고구려군대가 진입하는 위험한 작전일 했겠느냐하는 점입니다. 성공하면 신라의 허를 찌르는 공격이지만 그만큼 부담이 크고 오히려 지금의 아차산성을 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온달산성

세 번째 드는 의문점은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전투현장에서 방문한 평강공주의 말을 듣고 관이 움직였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하는 것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그가 조국의 오랜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는 회한과 그럼에도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해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결합된 극적인 내용이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한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는 "평강공주가 '국토를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시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며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온달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라는 것이 아니라 전투현장에 찾아온 평강공주가 온달의 시신을 보고 그 자리에서 졸도해서 같이 묻은 것을 표현한 것으로 신채호 선생은 이러한 이야기를 <조선사략>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온달과 평강공주

  온달은 미천하지만 크게 출세하여 왕의 눈에 들었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평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지만 그는 목적을 이루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신라의 일전을 다짐합니다. 아마 이러한 선택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정치적 상황과 온달 개인의 사정, 아니면 고구려를 향한 그만의 충정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요. 모든 것은 여러분의 생각에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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