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진실은
2022. 7. 1. 16:2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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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많은 왕들이 있었고 그 중 아직도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왕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왕들은 해당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의 삶도 태평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가 있던 시절 각 나라마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 있었으니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광개토대왕입니다. 사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전에는 고구려가 강대한 나라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광개토대왕이 왕이 되기 50년 전에는 연나라가 침입해 백성 5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전투 중에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근이 덮치면서 백성들은 살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광개토대왕 시기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전 고구려 왕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고구려 전성기의 발판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바로 소수림왕입니다. 역사교과서에서는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정도로 언급되는 왕입니다. 율령은 율(律)은 죄를 정하는 형벌법, 영(令)은 교령법(敎令法)으로서 율령반포의 의미는 단순히 법제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존의 법제를 없애거나 고쳐서 고구려의 실정에 맞게 정비한 것입니다. 불교 공인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에도 전통신앙이 존재했을 텐데 372년에 전진으로부터 승려와 불상, 불경을 받아들이고, 375년에는 처음으로 수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서 외국인 승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를 머무르게 하여 국가차원에서 불교를 장려합니다. 율령을 반포하는 과정이나 불교를 인정하는 절차에서 과연 귀족들과 마찰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낀 소수림왕은 밀어부쳤고 이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전성기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소수림왕의 다음 왕은 고국양왕으로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입니다. 아마도 고국양왕은 소수림왕만큼 능력이 있던 왕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7개월 만에 요동을 치도록 합니다. 당시 화북지역은 분열시기로 그의 요동공격은 적절한 판단이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 했으나 후연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후 고국양왕이 요동에 대해 어떤 공세를 취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알 길이 없으나 아마 광개토대왕이 태자 시절에 아버지 고국양왕의 정복활동을 보면서 어느 정도 조기 교육을 받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광개토대왕이 태자로 책봉된 것은 386년이었습니다. 이후 391년 고국양왕 사후 즉위하였는데요. 그는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공격하여 10여개 성을 함락하고 396년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였습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하였으며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차지하고 동부여를 흡수하였으며 한강까지 내려와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고구려는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으며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412년 광개토대왕은 사망했으며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 약 6.39m, 너비 2m의 광개토대왕릉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되었으며 이 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석이라고 합니다. 그럼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을까요. 이 비문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제1단에서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설화와 광개토대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죽어 장수왕 2년에 이 비를 세우기까지 기록한 241자입니다. 그리고 제 2단에서는 920자로 되어있으며 대외정벌에 관한 기록이 있고 제 3단은 641자로 능과 비를 위해 3백30가(家)를 능묘지기로 삼았음을 적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는 비문의 구절이 한일 양국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문제가 되는 이 문장에 대해 일본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토대로 일본은 4세기와 5세기에 한반도남부를 경영하며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고구려와도 싸운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민족사학자 정인보는 고구려를 주어로 하여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여 왔으므로 고구려가 공략하여 왜를 무찔렀다’고 해석하며 그것은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서도 "백제가 왜와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를 자주 침범하게 하였고 이에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 비문에 대해 조작시비도 있습니다. 이미 일제시대 때 조작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당시 활약한 이홍직박사도 일본인으로부터 ‘2자(字)를 고쳐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방 직후에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1970년대 한 사학회에서 우리나라 고고학자가 군사지리를 연구하기 위해 만주에 가 있던 일본군 대위가 비문의 탁본을 뜨면서 고대일본이 조선까지 진출한 것처럼 비문의 일부를 바꿔치고 참모본부는 이 범죄행위를 숨기기 위해 1900년 전후 비면에 석회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고학자는 원문에는 내도해(來渡海)나 파(破)란 글씨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이에 일본인학자는 일본 측에 불리한 기사를 변조했다면 왜적(倭賊)과 왜불궤침입(倭不軌侵入), 왜구궤멸(倭寇潰滅)같은 일본에 문구를 그대로 두었을 리 없었을 것이며 당시 이 탁본을 뜬 사람이 일본군대위가 아니라 남의 뜬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일본군 대위와 비문을 해석한 사학자 요꼬이씨가 서로 그런 짓을 공모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 학자는 서예학적인 관점에서 파고 들었습니다. 그는 '도해파(渡海破)'란 글자가 변조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면서 그 근거로 가로세로가 반듯한 다른 글자들과는 달리 이 세글자가 서체가 누워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는 '입공우(入貢于)'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일본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에 조공을 바쳤으므로 (고구려는 일본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보고는 있으나 학자 스스로도 많은 사람들이 공인하지 않은 자신의 의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우리나라의 한 교수는 ‘신묘년 왜적이 신라를 침범하여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으나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의 국경을 치니 태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와 왜를 토벌하였다.’는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일본측의 주장대로라면 고구려의 왕의 업적을 기리는 묘비에서 고구려가 아닌 왜가 한반도 남부를 침범하여 경영했다는 사실을 왜 적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영토확장에 힘쓰면서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을 기울인 왕입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罔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그의 시호로 국강상은 그의 능성의 위치를 말한 것이고 광개토경은 국토를 넓힌 영웅적 업적을, 평안호태왕은 천하를 평정하고 만백성을 편안히 한 태평성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중심의 천하관을 확립한 광개토대왕을 뒤를 이은 장수왕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습니다. 아마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고 후세에 의해 이 비가 잘 지켜지기를 바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문 가운데 일본지역 정벌로 추측되는 두줄 125자가 완전히 뭉개졌는데 이끼를 없애기 위해 말똥을 바르고 불을 질러 글자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릉비가 우리나라 안에 있지 않아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수왕의 바람대로 광개토대왕릉비가 후대 사람들이 이 비를 잘 지켰는지 생각해 보면서 언젠가 광개토대왕릉비를 우리나라 안에서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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