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호분은 누구의 무덤인가
2022. 6. 28. 16:1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728x90
1949년 북한 황해도 안악군에서 안악3호분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안악 3호분 속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덤의 주인과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 부엌과 우물, 도축실, 외양간, 마차를 넣어두던 차고와 도끼를 들고 있는 무사, 수박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병과 보병, 악사들의 행렬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화의 부엌에서는 부뚜막 위에 큰 시루를 얹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떡을 찌고 있어 당시의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는데요. 벽화에는 서역인들도 표현되어 있으며 당시 활발했던 고구려의 대외교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관심이 쏠렸고 현재도 정확도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추측이 오고 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무덤에 대해 동수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무덤에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전하는 내용은 이러합니다.
"영화(永和) 13년 초하룻날이 무자일(戊子日)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이자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현도·대방태수(昌黎玄兎帶方太守)요 도향후(都鄕侯)인 유주(幽州) 요동(遼東)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 출신 동수(冬壽)는 자(字)가 □安인데, 나이 69세로 벼슬하다 죽었다."
그러면 이 무덤의 주인은 동수라고 보는 일반적입니다. 그러면 이 동수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까요. 자치통감에서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에서 왕위 쟁탈전이 발생했는데 모용씨 형제의 왕위 다툼에 패배한 세력이 고구려로 도망갔고 그 중에 동수라는 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덤은 동수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글이 무덤의 주인공 방의 입구를 지키는 장하독 위에 글씨가 쓰여 있는데 그 모양이 조잡한데다 장하독 그림의 반대쪽에도 묵서명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동수라는 사람의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무덤은 웅장한 규모와 더불어 250여 명의 행렬이 그려져 있으므로 왕릉 급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글자가 쓰인 깃발이 보이고, 벽화 주인공의 복장이 왕의 복색에 해당한다는 점, 그리고 무덤 주인공이 쓴 검은 관은 덧관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는 고구려 왕이 썼던 백라관이므로 안악 3호분은 왕의 무덤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장하독이 모셨던 고구려 왕의 무덤이라는 또다른 의견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수란 인물이 자치통감을 기사를 토대로 볼 때 그가 모신 왕은 바로 고국원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국원왕의 재위기간은 331년에서 371년인데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한 것은 336년이고 영화는 동진의 연호인데 영화라는 연호를 12년까지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영화 13년은 357년이므로 이 시기가 바로 고국원왕시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무덤은 어느 왕의 무덤일까요.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광개토대왕 이전의 고구려 왕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의 시체를 가져가고 더불어 고국원왕의 인질로 잡아가는 한편 남녀 인질 5만 여명을 추가로 잡아갔습니다. 343년에는 고구려가 전연에 조공을 바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고 355년 고국원왕 25년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안악3호분이 미천왕릉이 아니냐하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천왕릉이자 안악3호분을 343년에 조성하였고 357년에 기록하기 위해 미천왕릉을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보면 어떨까요. 고국원왕은 평양에서 전사했는데 그보다 남쪽인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에 묻혔다면 이해되기 힘듭니다. 게다가 당시 근초고왕 시기의 백제는 황해도까지 그 세력을 떨쳤고 그런 상황에서 국경 근처에 왕릉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무덤 안의 표현인데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 대에 조성된 덕흥리 고분보다 더 발전된 표현법이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처음에는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 이후의 무덤으로 추정했다고 합니다. 묵서명에 보면 동수를 유주 요동군 평곽현이 고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동수가 요동군에 속한 유주 출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4세기 후반 이 요동군은 대부분 평주에 속해있었는데 요동군이 유주에 속했던 적은 370년에서 380년 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광개토 대왕 이후에 이 유주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고 요동군은 유주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광개토대왕 이후에 조성된 것이고 이 무덤이 고국원왕의 이장한 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수왕이 백제에 원수를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국내성 귀족들이 반발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반대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그 사업의 일환으로 국내성 근처에 묻힌 고국원왕의 무덤을 안악3호분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무덤은 5세기 유행하던 벽화고분의 양식을 띠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의 장하독이던 동수에게 낙랑, 창려, 현도 , 대방 지역을 차지했음을 알리는 ‘낙랑상창려현도대방태수’라는 관직을 내리고 이렇게나마 고국원왕에게 옛 전연의 땅을 고구려가 확보했음을 고국원왕에게 알려 선대 왕의 원한을 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악3호분이라는 것이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북한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학설일 뿐, 남한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무덤에 주인공이 아닌 무덤을 세운 사람의 묘지만을 적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으며 고구려 왕호가 장지(葬地)와 관련이 있는데 고국원왕의 의미는 고국의 들판에 묻힌 왕이라는 뜻으로 고국의 들판은 국내성으로 보기 때문에 고국원왕의 무덤이 황해도에 있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안악 3호분은 구조가 중국의 석묘(石墓)와 유사할 뿐 아니라 벽화의 제재나 배치가 중국 후한대(後漢代)의 묘실벽화(墓室壁畵)와 유사하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인데요. 이러한 이유가 5세기에 이장하여서 그렇다하더라도 무덤의 주인공의 부인과 시녀들의 풍만한 모습은 중국 여인의 모습과 닮아 있으며 갸름한 고구려 여인과는 다릅니다. 여기에 더해 벽화의 그림을 살펴보면 오히려 동수라는 사람에 적합하지 왕릉급이라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합니다. 발견된 고구려의 벽화고분 중 가장 큰 규모이긴 하지만 왕의 무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바로 안악3호분이 동수의 무덤이라면 어떻게 4세기 중반에 이러한 무덤이 만들어졌는가 설명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세대가 변하고 이동을 해도 잘 변하지 않는 문화가 바로 장례문화라는 것입니다. 동수의 무덤이라 한다면 결국 이 무덤이 4세기 중반에 등장했다는 것인데 수도 국내성에는 5세기 초까지 여전히 돌무지무덤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황해도 지방에 이러한 벽화무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그 사람들이 이 황해도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자신들만의 장례문화를 지켜나가다가 동수가 사망하였을 때 그들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었다면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수의 무덤이라면 어찌하여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그를 위한 이 정도의 무덤이 축조되었는지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대 고구려의 모습을 생생히 알려주는 안악 3호분은 막상 그 주인에 대해서는 베일에 쌓여 있는데요. 왕의 무덤인지 아니면 동수의 무덤인지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제껏 몰랐던 새로운 역사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한 고구려의 원동력 개마무사 (0) | 2022.07.04 |
---|---|
중원고구려비가 알려주는 이야기 (0) | 2022.07.02 |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진실은 (0) | 2022.07.01 |
두 명의 고구려왕과 결혼한 우씨 왕후, 형사취수제 때문? (0) | 2022.06.25 |
낙랑공주는 왜 자명고를 찢어야 했을까. (0) | 2022.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