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는 왜 자명고를 찢어야 했을까.
2022. 6. 18. 10:5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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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의 비극적인 남녀사랑이야기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아들로 대무신왕은 그를 무척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대무신왕 15년에 호동왕자는 옥저(沃沮)를 유람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낙랑의 왕 최리를 만나게 됩니다. 낙랑의 왕 최리는 호동왕자에게 비범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고구려와 동맹을 의식해서였는지 그를 데리고 가서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낙랑국에 두고 혼자 고구려로 돌아옵니다. 그런 호동왕자는 낙랑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 최씨녀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런 말을 전합니다.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없을 것이요."
호동왕자가 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리라는 이유는 낙랑에 이전부터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리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랑공주는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찢어버리고 호동왕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를 알렸습니다. 호동은 그 말을 듣고 왕에 이를 전하고 낙랑을 공격합니다. 즉, 자신의 아내의 나라로 쳐들어간 것입니다. 북과 나팔이 있어 안심하고 있던 낙랑국의 왕 최리는 공주가 북과 나팔을 망가뜨린 사실을 알고 공주를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공주가 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리는 자명고를 찢어버린 것처럼 호동왕자는 이후에 모함에 의해 자살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럼 낙랑공주는 왜 자명고를 찢어야 했을까. 당시 고구려는 신흥강국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북쪽의 또다른 강국 부여와 일전을 벌여 부여왕 대소를 처단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구려도 많은 군사를 잃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소왕의 막내아우가 부여를 나와 압록강 인근에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부여 왕족은 백성 1만 여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합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후한과의 전투를 벌여 물러나게 했던 일도 있었는데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아무래도 한반도 아래쪽으로도 평안을 도모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낙랑국이었습니다. 아마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왕은 자신의 왕자를 낙랑의 공주와 결혼시켜 안정을 꾀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낙랑국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정략결혼요구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떠오르는 강자 고구려 앞에 낙랑국은 그저 그런 소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호동왕자가 옥저를 유람한 것은 계획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왕비의 아들이었던 호동왕자는 왕위계승에 우선자격이 아니었던 지라 공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무신왕의 정략결혼정책으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 결혼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 결혼하고 그냥 혼자 고구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결혼은 사실상 무효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당시 서옥제라는 결혼풍습이 있었습니다. '장가가다'의 어원이 서옥제에 기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장가는 장인의 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인의 집으로 신랑이 가는 것이니 일종의 데릴사위제가 됩니다. 하지만 여자집에 가서 남자가 쭉 사는 데릴사위제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 서옥제로 부부가 자녀를 낳고 성장한 뒤에 남자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일정 기간 여자의 집에 살았던 것은 바로 노동력이 중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농업사회였던 당시에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면 여자집에 노동력손실이 생기므로 그 전에 노동력 보상을 해주는 풍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서옥제를 따른다면 호동왕자는 낙랑국에 머무르거나 낙랑국의 시집가는 문화를 따르더라도 낙랑공주를 고구려로 데려갔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낙랑공주는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로 돌아간 호동왕자는 언제 돌아오는 것이냐며 낙랑국왕 최리는 공주를 타박했을 것이고 이것이 공주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불안전한 결혼생활에 낙담해있던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의 제안에 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낙랑공주가 혼쾌히 응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었을 경우 고구려 군대가 쳐들어와 자신의 나라를 무너뜨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또다른 상황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쳐들어오기 전에 고구려로부터 또다른 제안 또는 협박이 들어왔을 거라는 거죠. 고구려 쪽에서 낙랑공주에게 자명고를 찢으면 공주를 아내를 맞아들이겠다 수준이 아닌 자명고를 찢지 않으면 당장 쳐들어가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을지 모릅니다. 마음 약한 낙랑공주는 자신의 선택이 나라를 위태하게 만들지도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어쩌면 낙랑공주를 자명고를 찢게 한 것은 남편 호동왕자의 완전한 형태의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함보다 백성과 나라를 사랑해서 벌인 비극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 자명고란 실제로 무엇일까요. 일종의 비상경보장치는 아니었을까요. 아마 고구려군이 지나갈 만한 자리에 비상장치를 묻어두고 이것이 관을 통하여 북과 나팔을 울리게 할 수 잇는 그런 장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고구려의 출정은 낙랑국은 알지 못했고 이러한 것이 낙랑공주가 비상경보장치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라는 낙랑국왕 최리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낙랑국왕 최리는 낙랑공주를 가만두지 않았고 낙랑공주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호동왕자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이후 왕이 되기는커녕 태자가 되지도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맙니다. 공주가 그리워서였을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둘째왕비의 아들이었던 호동왕자를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가 호동왕자가 자신을 음해하려 했다면 모함을 한 것입니다. 아마 당시 첫째 왕비는 유력한 귀족가문출신이었을 것이고 호동왕자의 어머니 쪽 가문은 그보다 힘이 약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호동왕자는 결백을 주장하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대무신왕은 첫째 왕비의 모함의 의중을 물을 것이요, 이는 대무신왕에게 크나큰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호동왕자는 아내도 잃고 아내의 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모함에 승복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후 첫째 왕비의 아들 해우가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후에 폭군이 되어 측근에게 피살당했다고 하는데요. 이 이야기는 만화, 게임, 뮤지컬,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더 생기는데요. 바로 이야기 속의 낙랑입니다. 이 낙랑을 글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바로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조직한 4개의 행정구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호동왕자가 낙랑으로 쳐들어간 시기를 유추하면 호동이 사망한 건 기원후 32년이니 그 이전의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설치했다는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세워져 왕망에 의해 서기 9년에 잠시 끊겼으나 서기 25년에 다시 부활하여 서기 220년까지 존속하였는데요. 그런데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 대에 축출당합니다. 그럼 여기서 본국이 멸망하고도 낙랑은 100여년을 더 유지했다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는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 초기에 잠시 존재했던 소국이었고 식민지였던 한사군은 한반도 평양에 400여 년간 존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한다면 어느 순간은 행정구역인 낙랑군과 소국인 낙랑국이 동시에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 중국이 한반도 내에 설치한 행정구역 옆에 같은 이름의 나라가 세워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반면 학계에서는 한나라군이 설치한 낙랑군에 대해서 주류인 평양설과 함께 요서설이 맞서며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학계는 낙랑국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서기 37년에 고구려가 멸망당한 후 기록이 없다가 300년이 지나서야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존사학계가 주장한 평양설에 근거하여 한사군의 낙랑을 한반도 안에 집어 넣어야하기 때문에 실재했던 낙랑국을 억지로 역사에서 지우고 설화만 남긴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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