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고구려비가 알려주는 이야기

2022. 7. 2. 16:3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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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

옛날에 마을 입구에 돌 하나 혹은 둘, 여러 개가 세워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자신의 마을을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소중히 여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에다가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거나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는데요. 이러한 돌을 선돌, 혹은 입석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이러한 돌은 전설도 수반되어 있어 부락민들에 의해 신격화되기도 해서 불가침 구역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흔히 있는 거석문화라고 합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 있는 한 마을 입구에도 이러한 돌이 서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입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은 입석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돌은 마을 사람들은 소중히 여겼던 것 같은데요. 1972년에는 마을에 큰 홍수가 나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동네마을 청년들이 칠전팔기라는 글씨를 쓴 비를 세우면서 나란히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비에 대해 이렇게 기억합니다. 5백년전 이곳에 이씨 가문이 살았는데 이 돌기둥이 경계석으로 쓰였다고 하며 어떤 할아버지는 여기에 대장간이 있었는데 이 돌기둥이 대장간집의 기둥이었다고 합니다. 이 돌기둥에 글자 같은 것이 보여 낫으로 톡톡 쪼아보기도 했다는데요. 한편 정(鄭)여인이란 여자가 시할머니때부터 3대째 내려오면서 이 선돌에 백설기를 바치고 정성을 들였더니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전했습니다. 그냥 세워진 돌기둥 치고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러한 이야기를 갖고 있기에 마을사람들이 소중히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충주에는 내 고장의 문화유산을 찾고 가꾸자는 뜻을 같이하는 예성동호회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이 향토사학조직은 1972년 답사를 가다가 이 돌기둥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이 돌기둥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는지 돌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입석이라고 했잖아요. 입석은 자연석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돌기둥의 이끼를 걷어내니 글자가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둘기둥이 비문이 새겨진 것이라 생각했고 추론하기 시작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이씨 집안의 토지 경계석이라는 옛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답사에 참여한 동호인들은 이씨 가문에 토지를 하사하면서 이 돌기둥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것이 500년 정도 되는 일이니 조선시대 비석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는가 하면 1년 전에 단양적성비가 발견되었으니 진흥왕 대에 세워진 신라의 비석일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조사단이 서울에서 내려와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대왕(大王)이란 글자, 당주(幢主), 신라토내(新羅土內)란 글자가 보였으니 신라비로 추정되었습니다. 탁본을 뜨니 확실한 글자가 나왔고 ○○大王이란 글자, 그리고 ‘전부대사자’, ‘제위’, ‘하부’, ‘사자’란 글자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사용한 관직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모루성’이라는 고구려성 이름도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광개토 대왕릉 비문에도 적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학자가 대왕 앞에 있던 글자를 보았습니다. 그 글자는 고려(高慮)였습니다. 충북지역에서 고구려의 비석이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비는 마치 광개토 대왕비를 축소한 듯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화강암 기둥돌로  다듬어진 높이가 약 200cm, 앞뒤 넒은 면이 각각 55.52cm, 좁은 측면이 각 37cm와 32cm인 이 비에 대해 중원고구려비라 이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는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4면비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쪽 면은 글자의 흔적이 있지만 한 글자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었다고 합니다. 
이 비가 건립된 것은 대체적으로 고구려가 강성했던 장수왕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실시하던 때라 학자들도 장수왕 때로 보고 있습니다. 혹자는 문자명왕 시기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비석 앞면 첫째 줄에는 ‘高麗太王祖王令’(고려태왕조왕령)이라는 문장이 있기에 문자명왕 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구려가 강성했던 시기에 제작된 이 비에는 고구려가 자신의 왕을 대왕(大王)이라 부르면서 신라왕에 대해서는 동이매금(동이(東夷寐錦)이라 불렀습니다. 자신들보다 낮게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동이매금에게 의복을 하사했다고 기록하며 여형여제(如兄如弟)라고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즉 형제관계임을 기록한 것으로 고구려가 종주국, 신라는 아래에 있는 나라인 것입니다. 

호우총에서 나온 청동그릇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간접 지배하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비의 발견은 한반도 이남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았습니다. 비문에서 보이듯 당시 고구려는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은 아니지만 고구려가 신라를 간접지배했다는 유물이 이전에도 나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1946년 경주의 어느 고분에서 청동그릇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에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란 글자가 써있던 것입니다. ‘을묘년(415) 국강상의, 땅을 넓게 개척하신 호태왕의 그릇’란 의미입니다. 당시 강성했던 고구려가 신라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유물이 발견된 무덤의 이름도 호우총이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기에 신라는 내물왕이었는데 내물왕은 김씨 왕위 계승을 확립한 인물입니다. 이 시기에 왜와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여 고구려가 5만 명의 군사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더불어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강한 고구려의 위세에 백제와 신라가 연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중원 고구려비가 세워진 것은 아무래도 나제동맹이 맺기 직전인 고구려 광개토대왕시기와 신라 내물왕 시기에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2019년에 발달된 과학기술로 비문을 읽어내는 시도가 있었는데 영락 7년이라는 글자를 읽어냈다고 합니다. 그럼 이 비는 고구려 비석은 광개토대왕 시기에 세워진 것일까요. 2020년이 넘어서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석이 제 2의 광개토대왕릉비가 될지, 아니면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는 비석이 될지, 아니면 후대에 제작된 것인지 좀 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중원고구려비의 존재는 남한강 일대까지 고구려의 힘이 뻗쳤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흔히 생각했던 질문입니다. 바로 고구려가 강했을 때 왜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올지도 모를텐데요. 바로 삼국통일에 관심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왕조와 맞닿아있는 상태에서 백제와 신라 등 삼한 지역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대륙의 왕조들과의 대립에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나라들에게 군사를 일으켜 정벌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소모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섣불리 군사를 일으킬 경우 중국의 왕조들이 군사를 이끌고 오면 난감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너희는 우리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라고 할만한 조형물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것은 아닐까요. 특히 비문에는  ‘新羅土內幢主’(신라토내당주)라는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신라의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었단 이야기입니다.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고구려 천하관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건 아닐까요. 이 외에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척경비, 기념비, 개인의 공적비,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비라는 등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판독이 일부만 가능하고 그것도 해석이 달리되어 여전히 미스테리를 품은 비석이지만 이남 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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