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고구려의 원동력 개마무사
2022. 7. 4. 16:3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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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보기병 2만을 인솔하여 비류수 위쪽에서 방어하며 적 3000명을 죽였다. 철기 5000을 인솔하여 적을 토벌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옛 기록에 나와 있는 고구려가 위나라의 군대를 격파한 내용입니다. 이 기록에 보면 철기 5000이라는 단어가 보이는데 바로 개마무사입니다. 이 개마무사는 철갑기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마무사는 긴 기병창(삭)을 주무기로 사용했으며 보조무장으로 환두대도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한 창은 평균길이가 5.4m이고 무게는 6~9킬로그램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중국의 것보다 1m가량 더 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을 삭이라 불렀고 이 삭을 든 사람은 갑옷으로 무장했습니다. 그들이 착용한 갑옷은 비늘 모양의 가죽 조각이나 쇳조각이라는 의미를 지닌 수천 개를 붙인 갑옷미늘로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미늘로 가린 갑옷은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뒤덮었으므로 완전히 착용하고 나면 얼굴과 손만이 노출될 뿐이었으므로 말 그대로 중무장한 기병이었습니다. 게다가 발에는 강철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었으며 말에게도 안면갑과 갑옷을 씌웠습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각궁을 사용하기도 했다고도 합니다. 개마무사가 적의 진영 진하여 무너뜨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음으로 각궁이 실제로 착용했는지는 의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러한 개마무사는 신라와 가야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의 중갑기병의 찰갑이 아닌 판갑을 써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몹시 떨어졌습니다. 반면에 찰갑을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그 전투력이 뛰어나서 실제로도 많은 위력을 발휘하여 위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통구 12호분, 삼실총, 약수리 고분, 개마총, 안악 3호분, 쌍영총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마무사는 마치 고구려의 병사를 뜻하는 용어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개마무사라는 것이 일종의 중장기병으로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 예가 상당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특정 나라, 그리고 특정 시기에 있었던 부대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바로 고구려의 철갑기병을 뜻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개마무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나 가야에서도 발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마무사라는 것이 고구려의 것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들이 개마무사를 가장 잘 활용했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가수가 노래를 리메이크를 했는데 그것이 원곡버전보다 뛰어날 경우 리메이크된 노래를 원곡노래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듯이 개마무사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일 수 있겠습니다. 당대 고구려는 강력한 힘으로 중국과 대치하며 나름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구려의 중갑기병 ‘개마무사’를 운용하여 강한 군사력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삼국에서 나라마다 개마무사를 운영했으므로 오늘날 그 유물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에서 말에 씌우는 갑옷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경주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도에 나온 마갑은 길이가 약 290㎝, 너비는 약 90㎝, 무게는 약 36㎏에 달하므로 꽤 생각보다 무거웠습니다. 다만 이러한 무게를 이겨낸 말은 현재의 말보다 작았는데요. 말의 높이가 120∼136㎝였다고 하며 토우나 벽화로 토대로 했을 때 몸통이 크고 사람의 발이 땅에 닿을 정도로 묘사되었습니다. 반면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예는 낳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안나온 것도 아니고 중장기병의 모습을 한 기와조각이 발견됨에 따라 백제 역시 말에 갑옷을 입혀 군대를 운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에서는 무왕 27년(626), 의자왕 5년(645) 등 수차례에 걸쳐 백제가 갑옷을 만들어 당나라에 보내고, 당 태종이 철갑에 백제의 황칠을 청한 내용이 있으므로 백제의 갑옷제작기술도 뛰어났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유물보다는 벽화로서 그 모습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의 위력은 어떠했을까. 이것과 관련된 일화가 중국의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금나라 중장기병과 송나라 보병 2000명이 대결을 벌인 것인데요. 숫자로 봐서는 당연히 보병 2000명이 이길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전투대형을 갖춘 17명의 기병은 활을 쏘며 적진을 교란하며 종회무진하며 달리니 송나라 군사들은 오히려 당하기만 합니다. 반면 금나라 기병은 단 한 명도 잃지 않았습니다. 아마 화약 발명 이전의 최고의 부대는 바로 개마무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훨씬 이전에 고구려가 개마무사 3000명을 운영했다면 그 위력은 어마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국사람들은 여진족들을 두려워했으며 그 중에서 기마병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 이러한 기마병의 위력은 임진왜란에서도 발휘되었느습니다. 말탄 왜병이 여섯이 깃발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달리니 1만이 넘는 조선의 군사는 대형이 무너졌고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조선시대가 화약을 이용한 무기는 강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을 기마병의 운영에도 소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몇 백 년 이전의 고대국가인 고구려는 말과 친한 나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공주가 시장에서 좋은 말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일반 장사꾼의 말은 사지 말고 나라에서 기른 말을 사되 병들고 수척해진 말을 고른 다음 돈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설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한 나라의 공주가 말을 사는 데에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란 나라가 말과 관련된 것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경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고구려는 기마병을 운영하는 것과 더불어 말에게까지 당시로서는 최첨단 방어구라 할 수 있는 찰갑옷을 입혔습니다. 말에게 갑옷을 입히면 아무래도 기동성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말도 쉽게 지칠 수 있습니다. 이를 안 고구려사람들은 말에게 갑옷을 입히되, 체력소모를 최소로 하면서 기동성을 높일 수 있는 마갑을 개발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고구려가 한 때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던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러한 개마무사를 ‘말을 타고 있는 동쪽의 도둑’이라 부른 것은 당시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당대의 기준으로는 실용적이고 전투력이 강한 부대여서 상대하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운영하여 주변국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제철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으로는 우리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중국이 우리보다 더 선진적인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 역시 개마무사를 운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그들에게 경계대상이 되었던 것은 고구려의 제철기술이 탁월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경로가 아닌 고조선 시기 때부터 탁월한 제철기술이 있었고 이것이 고구려까지 이어져온 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중국의 전국시대 유적지 중에 철기가 출토된 지역이 20여 군데에 이르는데 이것이 대부분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철기가 한반도로 전국시대 때 명도전과 함께 유입되었거나 혹은 기원전 108년 경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철기문화가 도입된 것이 맞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고조선사람들은 철을 잘 다루었을 것이며 이 지역에서 나는 철생산품 또한 고급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여도 철기생산에 있어 선진국이었다고 합니다. 옛 부여지역에서 발견된 강철도끼는 탄소가 1퍼센트 이상으로 매우 단단한 편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 선조들은 철을 다루는 데에도 능수능란한 장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독 고구려의 벽화에서만 대장장이신을 볼 수 있으며 만주 집안시 통구의 이른바 오회분(五盔墳) 제4호분의 북실 벽면에 그려진 고구려의 철신상은 고구려의 철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철을 이용한 기술이 상당히 앞서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무장한 사람은 타면 말 위에 두 명이 탄 것과 같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맥궁으로 위장한 경기병들을 두어 이들로 하여금 상대 군대의 대형을 흐트러뜨리는 데에 힘을 섰습니다. 개마무사가 단독으로 위력으로 발휘한 것이 아니라 개마무사의 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다양한 보직의 군사를 두었을 것이며 이것이 강한 고구려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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