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 연가 7년명 여래입상이 알려주는 사실

2022. 7. 13. 21: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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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수많은 문화재들이 박물관에 전시됩니다. 그리고 이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합니다. 하지만 문화재를 지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들이 도난당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문화재 관리국장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밤 12시까지 돌려준다고,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1시에 전화하겠소."
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반 서울 덕수궁 미술관 2층 전시실을 순찰을 돌던 경비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유리진열장 속에 있어야 할 고구려불상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위와 같은 내용이 적힌 메모만 남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관리국과 경찰이 발칵 뒤집힌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범인은 오전 11시 반, 오후 3시, 6시에 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립니다. 수사는 진척도 없이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리고 약속시간이 1시간 남은 11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범인은 한강 철교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모래밭에 있으니 찾아가시오란 말을 남깁니다. 경찰은 불상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침입하여 순금 허리띠와 장식물 등 금제 유물을 몽땅 털어갔습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새벽 경주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나가고 있던 노인이 이상한 보따리를 발견했다며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도난당했던 신라의 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역시 범인은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65년에는 경남 밀양 표충사에 있던 청동향완, 67년에는 충남아산 현충사의 보관된 난중일기, 74년에는 전남 순천 송광사의 목조삼존불감을 도난당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되찾고 범인들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광복 이후 최대 미스테리인 고구려 불상 도난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문화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입니다.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은 얼굴에 눈코입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고 머리에 나발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날씬한 몸 위에 두꺼운 옷이 어깨를 뒤덮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왼쪽 손목 위에 걸쳐져 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북위 효문제 때 실시한 한화정책과 통하는 것으로 한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손바닥을 밖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삼국시대 불상에 많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손 모양에는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겠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6세기 북위불상과 비교하여 간략한 표현과 강하면서 균형잡힌 조형미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 불상입니다. 즉, 중국불상의 양식과 제작기법에 고구려의 담대하고 두터운 양식이 더해진 작품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했던 고구려인의 예술적 신념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1963년 경남의령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학계가 주목한 것은 광배 뒷면에 불상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새겨준 때문입니다. 특히 불상이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만큼 신라시대 유물로 볼 수 있었으나 명문에 “연가(延嘉) 7년 기미(己未)년에 고려국 낙랑의 동사(東寺) 주지”가 사도 40인과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발견 당시에는 고구려 불상이 어떻게 신라 땅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이 불상이 신라 이후의 고려에서 만들어진 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고 있습니다. 

뒷면에 새겨진 내용은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師徒)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하다.라고 써 있다.

그럼 분명 조성연대가 적혀 있는데 과연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명문이 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일단 '연가 7년'은 대체적으로 539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 '연가'를 연호로 본다면 중국 쪽에서 연가라는 연호를 쓴 적이 없으므로 고구려왕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연호가 정확하게 확인된 것은 광개토대왕의 '영락'이라는 연호입니다. 그러면 기미년이라는 것으로 다시 추적해봐야 합니다. 고구려가 불교가 전래된 것은 372년, 이후의 기미년은 419년, 479년, 539년, 599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럼 이 중에서 연가 7년을 근거로 어떤 왕의 7년째 되는 해를 찾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419년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가 장수왕 7년이므로 장수왕이 즉위하면 '연가'라는 연호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 아래 419년이 연가 7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419년으로 보기에 이 불상은 동시대의 불상들과 표현양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419년에 만들어진 불상이라면 인도불상의 착의법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은 중국식으로 입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북위효문제가 실시한 한화정책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라는 설명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이 419년에 제작된 것이라면 복위효문제가 한화정책을 하기 전에 고구려에서 불상에 한족복식을 입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과 비슷한 복장을 한 중국불상인 정광 5년명 금동불입상도 524년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 먼저 이런 복장을 입힌 불상을 제작하고 중국으로 전파된 건 아니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럴려면 이 유물 외에도 그러한 문화전파경로를 입증할만한 다른 유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539년에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가 7년은 꼭 어떤 왕이 즉위하고 나서 7년째 되는 해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것인데요. 그러니까 왕의 재위기간 중에도 연호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연호 뒤에다가 몇 년이라고 적습니다. 그 몇 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왕이 등극하고 나서 재위기간이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일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연구 끝에 이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를 안원왕이 재위한 기간(531~545)로 보고 있으며 안원왕 2년에 다른 연호에서 '연가'로 연호를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419년에는 북조와 달리 남조에서는 이미 한족복식을 한 불상이 나타났으므로 419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으며 479년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씨는 이러합니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句)麗國樂良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苐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師徒)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하다.
여기서 보이는 낙랑은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되며 동사에 대해서는 절이름인지 낙랑 동쪽에 있는 절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불상은 천불상 중 29번째 인현의불로서 조성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없다면 아마 이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은 신라의 것으로 대중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이 명문을 통하여 고구려의 불상양식이 신라의 땅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출토지만큼이나 미술양식을 통한 문화경로의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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