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고구려왕과 결혼한 우씨 왕후, 형사취수제 때문?
2022. 6. 25. 21:2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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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현대 사이에는 결혼식 문화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고구려에서는 형사취수제라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제도로 지금은 가정조차 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만 고대 국가 시기에는 남자가 전쟁에 나가 죽거나 돌연 사망하는 일이 많았고 따라서 여자가 과부가 될 경우 노동력 이탈로 이어질 수 있었고 노동력이 중요했던 농업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가임기 여성을 과부로 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손실이었기에 이런 제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서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는 예비적인 배우자의 관계 내지는 잠재적인 미래의 부부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적인 면에서는 유보된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면으로 보자면 당시 고구려에서는 여자 집에 혼납금을 주고 여자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혼납금이라는 게 형 혼자 마련했을 수도 있지만 동생이 어느 정도 분배하여 혼납금을 낼 수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생이 형이 죽었을 경우 형수를 취하는 것은 혼납금을 주고 얻은 권리의 행사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형사취수제를 통해 본 고구려 사회는 과부가 되는 형수를 동생에게 상속되는 나라로 볼 수 있으나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그게 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고구려 왕실에서도 형사취수제와 관련한 왕위계승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바로 고구려의 우씨왕후의 이야기입니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의 부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우소였고 그의 뒤에는 연나부출신의 명림답부가 있었습니다. 명림답부는 폭군으로 알려진 7대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내세운 인물로 고구려 최초 국상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신대왕이 죽고 아들 백고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국천왕이고 명림답부는 우소의 딸을 고국천왕의 왕후로 삼게 하니 그가 바로 우씨왕후입니다. 그리하여 연나부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여 신하들이 눈치를 보게 되었고 연나부 세력이 도를 넘는 행태를 벌였습니다. 이에 고국천왕이 이를 벌하려 하자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반란은 토벌되었고 고국천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을파소를 재상으로 삼아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고 진대법을 실시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우씨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우씨왕후는 이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형사취수제에 대해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씨는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발기를 찾아가 왕위를 이을 것을 권유했지만 고국천왕이 죽은 것을 몰랐던 발기는 우씨의 행실을 비난합니다. 아마 형수라는 사람이 한 밤중에 시동생을 찾아온 것도 이상한데 고국천왕이 죽은 것을 몰랐던 발기는 왕위를 계승하라는 우씨왕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분이 무안해진 우씨왕후는 둘째 동생 연우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연우는 예를 갖추고 우씨를 맞이하였고 우씨가 왕의 죽음을 알립니다. 연우는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되었고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매주게 되었는데 우씨는 연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고 생각하고 연우에게 밤이 깊었으니 자신을 궁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우도 그 길로 궁궐로 들어가서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산상왕이었습니다. 그러데 우씨왕후는 발기에게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씨왕후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음모를 가지고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요.
이 소식을 들은 발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공손씨에게 도망가고 군사를 빌려 고구려를 쳤지만 패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발기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산상왕은 안정을 찾은 후 우씨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우씨는 시동생의 부인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씨왕후가 다시 고국천왕의 왕후에서 산상왕의 왕후가 된 데에는 형사취수제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치 정치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산상왕과 우씨 왕후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형사취수제로 인해 우씨왕후와 연우가 결혼한 것이라면 후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산상왕의 아들이 그 뒤를 이어 동천왕이 되었습니다. 그럼 동천왕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산상왕과 동천왕의 어머니는 돼지가 연결해준 인연이었습니다. 산상왕은 재위 7년에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산천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꿈속에서 "소후(小后)로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염려말아라."라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게 됩니다. 하늘에 바쳐질 돼지이니만큼 중요한 돼지였습니다. 여기서 그깟 돼지 한 마리 잡겠다고 쫓아간다는 게 말이 될까 싶지만 궁중 제사에 쓰일 제물이 없어지면 해당 관리자는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돼지를 쫓아가 잡으려 하는데 주통촌으로 달아난 돼지를 아름다운 여인이 잡게 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후녀라고 합니다. 해산하기 전에 무당으로부터 왕비를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후녀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산상왕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 여인을 소후로 삼게 되었습니다. 유리왕 시절 국가적인 큰 제사를 지내려 할 때 돼지를 도망가서 잡으려 쫓아가다가 국내성의 입지를 확인하고 국내성으로 천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결혼할 때에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고 하니 돼지가 고구려에서는 중요한 동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씨왕후는 이 소후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후가 임신을 하자 산상왕은 소후를 적극 보호하였고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소후라는 여인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우씨왕후는 산상왕이 죽었을 때에도 살아있었는데요.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 했던 여인의 아들이 동천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우씨왕후는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거나 시종을 시켜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도록 합니다. 우씨는 동천왕이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동천왕은 우씨왕후를 왕태후로 받들게 됩니다. 동천왕이 마음이 너그러웠는지 아니면 우씨왕후세력이 만만치 않았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동천왕 2년에 연나부 출신의 명림어수가 최고직인 국상에 임명된 것은 당대 고구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세월이 흐른 뒤 동천왕 7년 우씨왕태후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자신이 과오를 많이 저질러 고국천왕을 볼 낯이 없으니 산상왕 곁에 묻어달라고 말합니다. 취수혼의 경우 본 남편의 무덤에 합장하는 것이 도리인데 우씨왕후는 스스로 산상왕 곁에 묻히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아마 우씨왕후가 말한 잘못은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의 왕후가 된 것을 말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당이 이런 말을 전합니다. 고국천왕이 강림하여 말을 하는데 어제 우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분하여 그와 싸웠다고 합니다. 고국천왕은 더불어 나라 사람들을 볼 낯이 없으니 조정에 이야기하여 어떠한 물건으로 자신을 가려달라고 전합니다. 그리하여 고국천왕 릉 앞에는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당시 우씨왕후가 고국천왕에 이어 시동생인 산상왕의 왕후가 된 것이 고구려 백성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어서가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따라서 하늘에서도 고국천왕은 고구려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왕위가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없었다면 삼촌과 조카 간에 왕위 다툼이 빈번해져 고구려의 역사가 더 짧아졌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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