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부흥운동과 보덕국
2022. 7. 24. 21:0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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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고구려를 치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있어 매번 침략을 당하는 능욕을 당하고 있어 편안한 날이 없음을 내가 불쌍히 여겨서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고 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땅을 모두 그대 나라에게 주어 영원히 편안토록 하겠노라.” 『삼국사기』
당태종은 당나라로 건너온 김춘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당태종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보이기는 하나 당시 위 말대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있던 신라의 김춘추는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면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에 대해서는 신라가 넘보지 않겠다라는 신라의 무언의 말이 포함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웃긴 것이 당시 당나라는 물론 이전의 왕조 수나라에서도 고구려를 무너뜨리려고 수 차례 군대를 보냈습니다. 단지 자기 신하국으로 두겠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했고 당나라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신라에게 도움을 주어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속내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는 욕심입니다. 대동강 이북의 땅은 당나라가 가져간다 하더라도 위 말대로라면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옛 백제의 수도를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당의 지배하에 두려 합니다. 하지만 이미 백제와 고구려는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었고 신라는 나당전쟁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기로 합니다. 신라가 자신들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도운 것입니다. 나당연합은 이제 나당전쟁으로 바뀌었고 고구려도 역시 자신의 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항쟁에 돌입하였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이끈 사람으로 고구려 수림성 출신이자 대형이란 관직을 지낸 바 있는 검모잠입니다. 이 때 수림성은 현재 경기도 파주로 보고 있기도 하지만 검모잠의 활동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평양 근처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검모잠은 고구려가 멸망한 2년 뒤인 670년에 유민들을 모으고 당나라 관리와 승려들을 죽이고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검모잠은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안승은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 내지는 외손자 쯤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검모잠 입장에서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고구려 왕손의 혈족인 안승을 내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검모잠은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는 않았습니다. 검모잠에게 있어 안승은 그저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허수아비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승은 이를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구려를 이은 적자라고 생각하고 권위를 내세우려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안승과 검모잠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고 검모잠은 안승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부흥운동이 어느 정도 당나라에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이나 망한 나라의 부흥운동을 이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의 지도부의 분열은 부흥운동을 더욱 어렵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승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여기서 끝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라로 가서 도움을 청했고 문무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했고 옛 백제 땅인 금마저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안승은 금마저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우리가 나당전쟁 시기의 고구려 부흥운동지에 옛 백제 땅인 금마저가 고구려 부흥운동지로 표시되어 있잖아요. 지도부의 내부분열에 따른 정치적 망명 그리고 신라 문무왕의 조처로 안승이 금마저에 옮겨 살게 되었는데 금마저는 이전 639년에도 백제 무왕이 수도를 사비에서 금마저(익산)로 일시 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금마저는 잠시지만 백제의 수도였으면서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운 보덕국의 중심지가 되었던 독특한 역사를 지닌 고장이 되었습니다.
그럼 왜 하필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에 거점을 정하도록 하여 보덕국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왔을까요. 문무왕은 당시 당나라와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입장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를 신라의 편으로 끌어들이면 당나라도 견제할 수 있는 효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적극 지원할 수 없는 게 신라의 입장입니다. 신라가 지원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그 세력이 커져 신라와 맞서게 된다면 그것은 신라에게 골치덩이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신라 문무왕은 저 멀리 고구려 땅이 아닌 옛 백제 땅인 금마저에 안승을 살도록 하였는데 금마저는 금강과 만경강에 둘러져 있으므로 이러한 지형조건은 고구려부흥운동 세력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고구려 부흥운동과 백제 부흥운동 세력 간에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고구려가 가지고 있던 외교노선, 즉 고구려와 왜와의 친선관계를 신라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입니다. 일본이 신라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맞선다는 것은 생각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신라입장에서는 일본과 친선을 맺어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일본이 배후에서 신라를 치는 일을 없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덕국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671년부터 683년까지 8차례에 걸쳐 거의 매년 일본에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보덕국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신라의 도움으로 일본에 도착했다는 걸 생각하면 신라가 고구려 안승을 지원한 목적은 여러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기본적으로는 백제의 세력을 무마시키는 데에 보덕국을 이용했을 것입니다. 금마저는 백제의 도성이 있던 곳으로 이 곳에 백제와 관련된 세력이 있을 것이므로 신라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삼아 이 지역을 통제하게 하여 근심거리를 덜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곳의 도성들과 시설들을 안승에게 내주어 보덕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세워주려 했을 텐데요. 이러한 문무왕의 결단은 안승으로 하여금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당연한 조처일 것입니다. 또한 안승은 고구려의 왕손이니 만큼 그를 자신의 아래에 두어 대동강 이북의 땅에 대한 연고권 주장을 대비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금마저에 안승을 살게 한 것은 정복군주로서의 인심이 아닌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계략이자 정복지역에 대한 포용정책으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무마시키려는 의도가 깔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게 하여 금마저를 근거지로 한 보덕국은 관등체제를 유지하며 나름의 국가역할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속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보덕국이라는 나라는 670년에서 684년까지 존속하였는데요. 즉, 나당전쟁이 끝난 뒤에도 보덕국은 존재하였고 이는 보덕국의 안승과 신라 문무왕과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680년(문무왕 20년) 3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 100단을 보덕국의 왕 안승에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임금 조카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
문무왕은 자신의 조카딸을 안승에게 보낼 정도로 그를 생각했으며 안승은 이에 감격해했다고 합니다. 이후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안승을 불러 김씨 성을 주고 경주에 살게 하여 보덕국과 분리하였습니다. 사실상 보덕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치권을 박탈당한 데에 불만을 품은 보덕국의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토벌군인 신라 장군 핍실(逼實)·김영윤(金令胤) 등이 전사하였고 보덕국의 반항도 강력했습니다. 그러나 성이 함락된 뒤에는 금마군이 설치되었고 고구려 유민들을 남부의 여러 지역에 나누어 이주시키니 보덕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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