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축기술의 결정체 장안성
2022. 11. 9. 07:5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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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졸본에 도읍한 국가였으며 이후에 도읍지를 2번에 걸쳐 국내성과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도읍지에는 고구려만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로 고구려 도성제로 평지 거주성과 유사시 방어목적으로 사용하는 산성을 같이 축성한 것입니다. 졸본에 도읍하던 시기에는 평지성인 졸본성과 방어기능을 담당하는 오녀산성이 있었고 유리왕 대에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도 이를 이어받아 만든 것이 바로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양 내에서 586년에 도성을 장안성으로 다시 한 번 옮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평양성 내에서 한 번의 이동이 있었던 셈이므로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총 3번의 이동을 통해 왕의 거처를 4군데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도읍지라고 할 수 있는 장안성은 고구려 성 축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이전과는 달리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된 복곽식 성곽으로서 평산성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곳은 평상시에는 거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유사시에는 적군에 대응할 수 있는 곳으로 변하는 성으로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고구려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성은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성벽의 총 둘레는 23km, 총면적 2㎢에 달하는 성으로 당시 최대 규모였으며 이는 당나라 장안성의 16km보다 큰 수치입니다. 북쪽에는 금수산을 끼고 동서남북으로는 대동강과 보통강을 끼고 있으니 천연의 해자가 성을 둘러주는 곳이 바로 평양성입니다. 이 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된 석성으로 기능과 역할에 따라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고 각 구역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각 구역의 성들도 성벽을 쌓아 방어하도록 했으며 이중 왕국으로 행정적 핵심기능을 하는 곳은 내성이었고 일반주민은 외성에 거주하였고 왕궁을 보호하는 북성과 관청이 들어선 중성이 있었습니다.
"(평원왕) 28년(586)에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고구려가 평양 내에서 다시 한 번 장안성으로 옮긴 것은 586년으로 평원왕 시기의 일이지만 적어도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아마 그의 선친인 양원왕 대에 이미 계획된 것으로 보입니다. 도읍을 옮기는 것은 국력증흥을 꾀하거나 기존의 지배세력을 누르기 위해 진행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그러했습니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그리고 사비로 옮긴 것은 국가적인 위기를 넘기거나 보다 나은 국가경영을 위한 것이었고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것도 ‘산수(山水)는 험하나 농사짓기 좋고 짐승과 물고기도 많아 백성이 넉넉할 것이고, 방비하기도 좋았다.’는 신하의 보고 때문이었습니다. 장안성으로 옮길 계획을 하던 양원왕은 국가적인 위기와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양원왕은 안원왕이 죽은 뒤 두 왕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경쟁 때문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가 즉위한 후에도 귀족들의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환도성의 귀족들이 모반을 꾀하기도 대외적으로는 돌궐족들이 고구려의 백암성을 공격하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원왕과 고구려귀족세력들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동안에 쌓아 왔던 건축술을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도성을 계획하게 되었고 552년에 준공하게 586년에 완공하였으니 30년이 넘는 대공사였습니다. 이렇게 만든 평양성과 주변에는 21만 508호가 사는 공간이었습니다. 물론 의견이 갈릴 수는 있겠으나 당시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은 규모면에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였을 것입니다.
평양성은 어떤 모습으로 쌓아졌을까. 북한의 박물관에는 평양성의 일부였던 ‘각자성석’ 즉, 글자 생긴 성돌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돌을 쌓은 시기와 공사구획의 내용 그리고 누가 쌓았는지 기록하였는데 이른 바 건축실명제입니다. 일례로 한 돌에는 ‘小兄文達(소형문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소형은 고구려 관직이고 문달은 고구려인의 이름입니다. 또한 어떤 돌에는 병술, 기유라는 기록을 통해 언제 이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돌의 기록을 미루어볼 때 내성공사가 마무리되고 외성공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어느 방향으로 어느 길이만큼 쌓았는지 성돌에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공사진행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면모를 가진 나라였고 따라서 연인원 40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42년 동안 건축한 것이 평양성은 고구려 건축기술이 집약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고구려의 성의 특징을 무엇일까. 일단 고구려의 성벽을 이루는 돌의 크기가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후대의 고려와 조선의 성벽의 큰 돌크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보통 성벽이라고 하면 외관이 반듯할 것 같지만 고구려의 성벽은 굴곡이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성의 전형적인 축조방법은 바로 육합쌓기라고 하는 것으로 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섯 개의 돌을 끼워서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넣는 돌은 쐐기모양의 돌로 돌의 뒷면을 마름모꼴의 모양입니다. 이렇게 쌓으면 몇몇 돌들이 빠져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며 당대 중국의 성과 비교하면 훨씬 튼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에 쌓는 돌은 규격화되어 있으니 이는 대량으로 생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쐐기돌의 뒤편에는 작을 돌을 채워 넣어 견고함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양성의 축조의 특징은 위로 갈수록 들여쌓기를 했는데 위로가면 똑바로 쌓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것은 밑에서부터 바로 쌓는 것보다 더한 강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구려성의 특징은 치를 들 수 있습니다. 치는 성벽 밖으로 돌출해 적군에게 측면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한 구조물로 성벽으로 공격하는 적들을 향해 좌우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시설입니다. 그리고 성문 주변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성벽으로 옹성이 있습니다. 이는 성문에 접근한 적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공격하기 위해 구조물로 동시대의 백제나 신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건축법입니다. 유럽에서는 옹성을 바비칸(Barbakane, 작은 요새)이라 하며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이 옹성(瓮城, Urn Castle)이라고 불렀는데 고구려가 옹성의 건축법을 보이는 이유는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옹성 건축법은 조선시대에도 한동안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성종 10년(1479) 좌승지 김승경이 ‘중국의 역참은 모두 옹성이 있지만, 숭례문은 중국사신이 출입하는 곳이니 옹성을 쌓지 않는 것이 맞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사대주의사상의 합리적인 방어시설의 건축을 막은 것이었으나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자 조선후기에 전국의 성곽 건축에 옹성이 활용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적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인 ‘황’을 만들었는데 자연해자가 없는 내성 부근에 이 황을 설치했습니다. 이렇게 쌓은 고구려성은 각각 4개의 구획으로 정리된 성마다 방어기능을 담당했으니 난공불략의 성의 기능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평양성입니다.
방어기능이 우수한 평양성은 계획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실학자 박지원이 쓴 『과농초소』에서는 “큰 도로는 줄을 낸 듯 바듯하고 가로수는 똑바르다,”라고 하였으며 한백겸의 1607년 당시 평양 외성 지역을 조사한 그림에서는 바둑판 모양의 도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백겸의 기록에서는 도로의 폭도 알 수 있는데 가장 작은 단위의 구획인 1묘로인 1.4m이고 다음 넓은 도로는 3묘로, 즉 4.2m, 그리고 가장 큰 도로는 9묘로로 표시되어 폭이 12.6m였습니다. 도로의 폭을 나타내는 법수가 사거리마다 표시되었고 이는 도시 전체에 도로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외성에는 물길인 운하가 발견되었으니 이는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평양성은 잘 정비된 도시이자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평양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국보 1호로 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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