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교류를 위한 승부수 장수왕의 남진정책

2022. 11. 25. 07:5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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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시 도기동의 삼국시대 목책성 유적.

장수왕이 고구려의 왕으로 있던 시절, 대륙은 이민족의 화북과 한족(漢族)의 화남을 차지하며 남북조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던 만큼 외교전쟁은 더욱 치열했는데 장수왕은 413년에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고 이에 동진은 장수왕에게 작호를 내립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대국였던 지라 송나라에서 작호를 내려 안심시켰습니다. 한편 425년에는 북위로부터 화친동맹을 맺어 작호를 받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위의 황제에게 북위황제의 한자를 물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왕조에서는 천자와 그 조상들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문서에 쓰는 것을 관례로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러한 글자를 알고 싶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천자국으로 받들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복속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언제든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북위는 고구려는 맞닿아 있었고 그 사이에는 북연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위는 이 북연을 정벌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북위의 태무제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출정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양해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북연왕 풍홍을 잡으러간 북위는 뜻밖의 손님 고구려군대를 마주하게 되었고 가운데에 있던 북연 화룡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고구려망명에 반대하는 풍홍의 반대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들은 문을 열어 북연의 군대를 맞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복병이 있을 것을 우려한 북위의 군대가 주춤하는 사이에 고구려의 군대가 들어가 성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약탈을 이루어진 후 빠져나가는 고구려군을 북위군이 쫓아갔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끌고 온 북연의 주민들을 갑옷까지 입혀 형세를 크게 보이게 하니 북연군은 쉽게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북위 태무제는 풍홍을 북위에 보낼 것을 고구려에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를 거절하니 조공-책봉 관계는 사실 허울 뿐이었습니다. 이사이 풍홍은 망명을 요청한 고구려의 뒷통수를 때릴 준비를 했습니다. 바로 남조의 송나라를 끌어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군사를 일으켜 북위를 칠 것을 맹세하였으니 평소 북위를 의식한 송황제는 풍홍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송은 장수 왕백구에게 7천 여명의 군사를 주어 황제의 서신을 고구려에 전하며 북연왕 풍홍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고구려는 당황하였습니다. 송나라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줄 경우 북위의 공격을 볼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고구려의 장수왕은 군사적 행동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군대는 풍홍이 머물고 있는 북풍에서 맞닥뜨리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풍홍이 자신의 계획처럼 송나라로 도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즈음 고구려의 군대에 발각되어 일가족이 몰살당했고 사실상 송나라 군대는 북연의 풍홍을 구하러 온 목적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송나라의 왕백구는 7천의 군사를 믿고 유격대 수준의 병력의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퍼붓고 고구려 장수 고구가 죽고 손수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륙으로 깊게 들어왔던 송나라의 군대는 고구려에서 보낸 대군에 반격을 당해 왕백구가 사로 잡혔습니다. 고구려는 왕백구와 함께 사신과 함께 보내며 항의하였고 송의 황제는 모든 책임을 왕백구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는 일을 무마하였습니다. 430년대에 있던 풍홍 사건은 국제정세가 얼마나 긴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며 조공-책봉 관계야말로 형식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련(璉)에게 말을 보내달라고하니 800필을 보냈다.’ 『송서』
련(璉)은 장수왕의 이름으로 고구려에서 송나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습니다. 고구려에서 말을 많이 생산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말은 귀한 품목이었을 테고 또한 항해술과 조선술 없이 바다 건너 말 800필을 보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구려 장수왕은 이에 응답한 것인데 바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 무덤에서 출토된 금장식. 당시 선비족 국가 삼연(三燕)과 고구려와의 문화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강한 군사력과 외교력으로 어느 정도 북방에 안정을 기한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실시합니다. 그러면서 평양성 천도를 단행하는데 이러한 천도계획에는 반발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게 고구려를 응징해달라며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장수왕이 천도를 하면서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민심을 이반했다는 내용입니다. 백제 개로왕입장에서는 북위에게 군사적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계략일수도 있으나 평양성 천도에 반발한 국내성 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천도를 위해 단행한 대규모 토목공사, 이렇게 힘든 과정을 알면서도 장수왕은 남진정책만을 위해 평양성으로 천도했을까. 
고구려는 본래 땅은 척박했습니다. 그런 반면에 대동강 주변은 농업하기에 유리했습니다. 또 여기에는 대동강이 있어 중국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국내성은 내륙에서 압록강하구로 가는 길도 먼데다 빠져나간다 해도 배가 북위의 군사에게 잡힐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평양은 그런 위험이 덜 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 천도를 통해 국내성 귀족을 견제하고 강력해진 왕권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더 강한 고구려를 만들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장수왕의 남진정책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 
 2001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의 남성골산성의 토기용 가마터에서 고구려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무기들이 발견되었으니 남성골산성에 고구려군이 주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성골산성은 470년에서 49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475년에는 장수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의 목을 친 때입니다. 그리고 이후 남진을 계속하여 고구려군은 월평산성에 이르렀는데 월평산성은 대전광역시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 곳은 백제가 6세기말~7세기초에 지은 성으로 이 석성이 축조되기 전에는 고구려군이 토성을 쌓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새로운 도읍지인 웅진근처까지 압박하고 내려온 것입니다. 다만 석성(石城) 등 견고한 성을 쌓지 못하고 주둔지에 목책(木柵)과 환호를 두른 점이나 이 유적에서 불타 무너진 목책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고구려군이 여기서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청주를 둘러싼 삼국의 세력권

몽촌토성에서 고구려토기와 고구려의 온돌건물터를 발견했는데 그 형태가 5세기의 것으로 장수왕 대로 추정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고구려의 남진기지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대전까지 내려간 고구려군, 그런데 몽촌토성의 토기들은 살펴볼 때 고구려군이 이 곳에 주둔한 것은 475년~500년 사이로 추정되었습니다. 상당히 짧은 기간입니다. 그리고 아차산 일대에는 고구려의 보루가 많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발견된 토기들은 6세기 초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대전까지 내려간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반격을 받았고 5세기후반에는 한강남쪽의  몽촌토성, 그리고 6세기 초반에는 한강이북의 아차산성 일대로 전선이 밀린 것입니다. 한편 경기 안성시 도기동의 삼국시대 목책성 유적에서는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볼 때 백제가 만든 뒤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이 일대를 점령하면서 고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밀고 밀리는 형세를 보였습니다.  
한강 이남지역을 두고 치열하게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였던 이유는 이 지역의 경제력 확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국제교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백제는 장수왕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 백제 국제 교역망은 어려움에 처했고 484년에는 중국남조로 가던 백제 사신일행이 고구려 수군에게 저지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경제적 피해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 어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반면 이 지역을 차지한 장수왕 시절에는 일본과도 교류했으니 그 정도로 한강 유역 확보는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차지한 나라는 중국과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었고 강력한 수군으로 다른 경쟁국가들이 중국과 교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장수왕의 평양성천도에는 중국과 교류를 원활하기 위함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며 한강을 점령하는 것 또한 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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