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리 고분 유주 자사 진의 출신은 어디인가.

2023. 4. 3. 09: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728x90

덕흥리 고분 유주 자사 진의 모습

덕흥리(德興里) 벽화무덤은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 구역 덕흥동 무학산 옥녀봉 남단 구릉에 자리잡은 고구려의 흙무지돌방무덤으로 지난 1976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에는 무사도와 견우와 직녀 설화, 그리고 불교의 도입을 엿볼 수 있어 고구려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고분벽화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사들의 모습이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여인들이 나들이를 그린 그림에서는 주름치마와 햇볕가리개까지 묘사돼 상류층 부인들의 호사스런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08년이라고 하는 연대도 쓰여져 있으니 이는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꽃그림은 망자에 대한 불교의 내세관을 표현한 것인데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기에 이미 상류사회에서는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덕흥리 고분에서는 견우와 직녀의 설화가 표현되어 이를 벽화로 확인할 수 있으며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모습을 그린 독특한 벽화를 통해 장생불사하는 조류숭배 신앙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들이 있는 덕흥리 벽화고분 앞방 천장의 북쪽에는 무덤 주인의 출생지와 관직명 등을 밝힌 묵서명문이 적혀 있습니다.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였다. 진은 77세로 수(壽)를 누려 영락(永樂) 18년 무신년(戊申年)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武王)이 시간을 택하였다. 날짜와 시간의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유함은 7세에 미쳐 자손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영원하기를.’
이 묵서는 묘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무덤의 주인은 408년 (영락 18년)에 죽은 유주 자사 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은 신도현 출신으로, 관직은 무관, 광개토대왕 당시의 유주자사까지 이른 고위관료였습니다. 그리고 묵서를 통해 진은 불교신자이지만 지배이념으로 정착된 불교 이외에도 유교와 도교를 수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 13인의 태수

앞방 서벽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배례하기 위해 온 유주에 속한 13군 태수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태수들은 같은 복장과 같은 자세를 하고 있어 유주자사를 향하여 위아래로 도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쪽의 단에는 연군(燕郡)·범양(范陽)·어양(魚陽)·상곡(上谷)·광녕(廣寧)의 태수들과 대군내사(代郡內史)가, 아래쪽의 단에는 북평(北平)·요서(遼西)·창려(昌黎)·요동(遼東)·현도(玄兎)·낙랑(樂浪)·대방(帶方) 등의 7군 태수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는 유주부의 관리와 시동도 아래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태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태수들은 꼬리가 뻗은 책형의 관모를 쓰고 있으며, 황색 도포형의 관복을 입었고, 두 손을 소매 안에 넣어 가슴에 모으고, 허리를 약간 굽혀 읍하는 자세로 북벽의 자사를 향하고 있으며 명문에는 13명의 태수들이 유주관아에 내조(來朝)하여 자사를 배알하고, 자사가 부임한 데 따른 축하 인사와 사업 보고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고, 또 유주에 속하는 군과 현의 행정구역이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이 고분은 기존에 발견된 안악 3호분과 차이점이 있는데 안악 3호분이 ‘동수’가 죽은 해가 357년이라 하여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무덤의 주인은 명확하지 않은 것에 비해 덕흥리 벽화고분은 409년이라는 시기와 더불어 유주 자사 진이라고 주인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덤의 주인에 대해 의문점이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학계에서는 유주 자사 진이 과연 어느 나라사람일까를 두고 물음표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그전에 살유주 자사 진 아래 13군 태수들의 통치지역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 베이징 근처의 하북성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는 동쪽의 요서지방까지 통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지역을 통치한 유주자사 진의 출신지은 어디일까. 일단 신도현 도향 중감리라는 문장이 보입니다. 그렇게 이 지명과 관련하여 『고려사』 지리지의 “가주는 본래 고구려의 신도군이다.”라는 문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주는 현재 평북 박천 일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서』에는 ‘기주 안평국 신도현’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진이 중국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유주자사를 지낸 진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그 자리를 유지하다 죽게 되자 묘지명을 통해 자신의 출신을 중국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덤주인인 유주자사 진이 당시 중국 북조의 하북성 유주(오늘날 베이징 부근)를 다스렸던 인물로, 중국서 온 망명객일 것이라는 한국과 중국 학계의 주류설이 있는 가운데 고구려 서북 강역의 통치자였다는 북한학계의 견해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덕흥리 고분벽화수레와 여인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 진(鎭)’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성씨가 두 글자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중국인들의 성씨는 대개 한 글자입니다. 그럼 두 글자의 경우는 역사에서 어떤 것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북위를 세운 선비족의 탁발씨, 그리고 전연, 후연을 세운 것은 선비족인 모용씨입니다. 그리고 백제의 왕족으로 부여 씨가 있으며 사택지적, 흑치상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택 씨나 흑치 씨가 두 글자의 성씨입니다. 그러면 유주 자사 진은 어떠한 성씨를 가졌을까요. 한 때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고 하잖아요. 그리면 유주 자사 진에 대해서 부여씨라고 가정해 보면 요서지방의 백제 왕족 부여씨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다를 건너 286년에 한성 백제의 정권을 잡게 되고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요서백제가 한성백제에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32년에 요서백제에서 태어난 부여 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환갑의 나이로 고구려에 망명했다면 유주자사 진이 부여 진이라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가 왜 고구려로 망명해야 했을까요. 고구려가 백제에까지 세력을 뻗쳐 유주 자사 진이 고구려로 망명을 택해야 할 상황이 왔는지도 모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392년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 바로 관미성으로 현재 이 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 황해도 장산곶, 연천 전곡, 파주 오두산성 등이 그 후보지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에 더해 비사성이 관미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니 비사성은 현재 중국 랴오닝 성 다롄 시에 있는 대흑산성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험한 산 위에 성을 쌓아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이에 앞선 392년 9월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본다면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생포하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만약 관미성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남부 어딘가에 백제 땅에 있었다면 불과 한 달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남쪽의 백제와 서쪽의 요동반도를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보다 고구려가 요서백제를 쳐 점령하고 그 곳에 살던 유주 자사 진이 고구려로 망명해왔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한편 유주 자사 진에 대해 성이 모용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무덤 글에는 그가 한 벼슬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처음에 건위장군 군소대형이 나옵니다. 이는 그가 고구려 벼슬부터 하였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가 요서백제인 부여 진인지 아니면 고구려에서 벼슬을 시작한 북방유목민족 출신 모용 진인지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