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은 왜 황조가를 지었을까

2023. 8. 28. 19: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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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諱) 유리(類利)·유류(儒留)·주류(朱留)라고도 불리는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주몽)의 원자(맏아들)로 부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하였고, 그해 4월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나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후에 왕이 된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왕이 되어 올바른 이치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이도흥치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유리명왕에 대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린 임금님이라고 칭송한 것인데요.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그가 나라의 시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고구려역사에서 유리명왕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리명왕 대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은 바로 도읍지를 국내성으로 옮긴 것입니다. 
'오락가락 꾀꼬리는/암수 서로 즐거운데
외롭구나 이 내몸은/뉘와 더불어 돌아갈꼬.' -황조가-
황조가를 지은 이는 바로 2대 고구려왕 유리명왕입니다. 그리고 황조가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데 '공무도하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유리명왕에게는 여러 여인이 있었습니다. 유리왕에게 첫째 부인은 다물후 송양의 딸로 송양은 원래 비류국 왕이었으나 추모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였습니다. 따라서 비류국은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었고 송양은 그곳의 통치를 맡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 추모왕이 죽기 전에 송양에게 딸을 태자와 결혼시키라고 하였을지,  송양이 계속 다물후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정략적으로 유리왕에게 딸을 바쳤을지, 아니면 유리왕이 송양의 지지기반을 이용하여 왕권(王權)을 탄탄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았을지 알 수 없습니다. 유리왕은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후, 다음 해 7월에 ‘골천’이란 곳에 이궁(離宮)을 지어 함께 지냈습니다. 기존의 왕궁은 정사(政事)를 펴는 곳이고, 새로 지은 이궁은 오직 왕비와 함께 지내기 위한 별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결혼 1년 3개월(유리명왕 3년 10월)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娶)하여 계실(繼室)로 삼으니, 하나는 화희(禾姬)란 이로 골천인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雉姬)란 이로 한인(漢人)의 딸이었다.’ 『삼국사기』

 ‘골천인’이란 바로 이궁을 세운 지역의 유력자로 화희는 그 사람의 딸이며, 치희는 고구려 서쪽 변방에 와서 살던 한나라 사람의 딸이라는 것 말고는 배경이 불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리왕을 두고 두 왕비 간에 질투가 심했다고 합니다. 이에 유리왕은 양곡이란 곳의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궁(宮)을 짓고 두 여자가 각기 떨어져 살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유리왕이 기산(箕山)이란 곳으로 사냥을 나가서 7일 동안 있었는데 이때에도 화희와 치희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화희는 치희더러 ‘한가한 집안의 비첩으로 무례함이 어찌 심한가.’라고 하니 치희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껴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에 유리왕은 말을 타고 쫓아갔으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자고 했으나 거절한 것입니다. 아마 화희의 질투 뒤에는 부친의 권세가 자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리왕 입장에서도 치희를 데려오고 싶으면 화희를 처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화희 집안의 권세가 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치희는 어땠을까. 그가 정말 별볼일없는 집안의 여자였다면 그가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유리왕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유리왕은 화희의 골천세력을 배제하고는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이미 소서노 세력이 남으로 내려갔으니 이로 인해 고구려왕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유리왕이 송양의 딸이나 골천세력가의 딸을 부인으로 삼은 것은 고구려의 왕권을 보전하고 더 이상의 세력이탈을 막기 위한 조처였을 것입니다. 다만 한인(漢人)의 딸 치희를 내보냈음에도 이와 관련되어 한인(漢人)들의 반발이 없던 것은 당시 고구려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왕은 골천에 이궁을 짓고 살았는데 그만큼 이 지역에 당시 유리왕에게 중요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진정 사랑했던 여인은 치희였고 그를 붙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심정을 ‘황조가’를 지어 달랬을 것입니다. 

한편 치희가 친정으로 돌아간 것은 고구려에서 한인(漢人)세력의 이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희와 치희의 다툼은 단순히 총애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아니라 그들로 대표되는 정치새력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인데요. 따라서 화희는 토착세력이고 치희는 한인 외래세력입니다. 유리왕은 정치집단의 결속을 위해 혼인이라는 방법을 썼고 때로는 이탈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황조가는 이렇게 보면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이 아닌 왕권이 약했던 고대국가의 군주의 정치적인 고뇌가 담겨진 작품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가 건국되는 시기는 기원전 37년으로 당시 압록강 주민들은 여러 단계의 통합단계를 거쳐 ‘나(那)’로 불리는 다수의 독립 정치집단을 이루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이 지역에 위만조선과 한나라가 그 힘을 뻗쳤고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에서 ‘나’집단들은 유력집단중심으로 결집했습니다. ‘나’집단들은 ‘구루’ 혹은 ‘홀’이라 불린 성을 만들었고 여기서 ‘구려’라는 명칭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싸움에서 위만조선이 멸망하자 한나라는 이 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현도군 내에 존재한 것이 바로 고구려현입니다. 아마 이 시기에 압록강 중류일대는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나라가 아닌 아마 정치세력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건국 이전의 고구려에 대해 단어가 같다고 고구려가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도군을 몰아내고 왕을 대표로 하는 연맹체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섯부족이 주축이 되었는데 『삼국지』에는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 연나부, 환나부, 관나부 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계루부를 제외한 4부의 명칭에는 '나(那)' 또는 '노(奴)'자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강가 혹은 산간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의 집단을 나타내는 단어로 내(內), 노(奴), 양(壤) 등과 통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는 위의 4부 명칭 외에도 ' 조나(藻那)' · ' 주나(朱那)' 등 '-나(那)'로 지칭되는 집단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의 초기에 중심지인 압록강 중상류와 그 지류인 훈장[渾江] 유역에 '-나'로 지칭되는 여러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계루부만은 ‘나’자가 이름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계루부는 처음부터 압록강 지역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 부여계 유이민 주몽(朱蒙)을 대표로 하는 집단이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건국 이후 5부의 유력자들이 핵심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국가를 운영하였고, 당시 정치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 부의 수장들은 제가회의를 열어 나라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했습니다. . 또한 계루부를 비롯하여 각 '나부(那部)'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국중대회(國中大會) 동맹(東盟)에서 각 나부의 대표들은 계루부 왕실의 시조를 고구려 전체의 공동 시조로 받아들이고, 계루부 왕권에 대한 복속을 약속하는 의례를 진행합니다. 주몽설화에서도 주몽이 비류국왕 송양왕을 누르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계루부가 소노부를 누르고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나 집단들은 최종적으로 다섯 개의 정치 집단으로 재편되었으며 이것이 고구려 5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나’가 5부로 재편되면서 고구려왕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리왕이 황조가를 지었던 이유에는 아마 이러한 정치세력과 왕이 협력하는 과정이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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