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초 태후 부여태후
2023. 8. 30. 19:5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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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원비는 그 성과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원비라고 하는 것은 첫째 왕비이기 때문입니다. 대무신왕에게는 갈사국왕의 손녀를 차비로 들이고 있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호동이 있었습니다. 호동은 외모가 뛰어났고 낙랑을 멸망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원비는 이 호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원비는 대무신왕에게 호동왕자가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 한다고 참소하였고 이 이야기를 대무신왕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비가 울면서 왕이 몰래 살피라고 하면서 그런 일이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바치겠다고도 하니 대무신왕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데에는 고구려에는 취수혼이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취수혼은 형이 죽은 뒤 형수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자식이 친모 외에 아버지의 다른 부인과도 혼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나이차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대무신왕과 호동의 나이차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인데요. 대무신왕은 11세에 태자가 되어 15세에 즉위했고 대무신왕 15년에는 29세였습니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10대 중후반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호동이 자신을 탐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1왕후의 정치적인 모략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첫째 부인의 아들인 해우를 태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일찍 죽는 바람에 어린 해우는 곧장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대신 대무신왕의 아우인 해색주가 왕위에 올라 민중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색주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자 마침내 해우가 왕위에 올라 모본왕이 되었습니다. 모본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후 48년의 일입니다. 모본왕은 역사 속에 한국사 최초의 폭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워낙 고대의 일이라 기록이 유실되었음에도 그의 행적은 좋지 않게 기록이 남겨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상은 더 심했을 것입니다.
모본왕 성품이 포악했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본왕은 즉위 초 홍수나 우박 등의 자연재해로 궁핍해진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본왕의 본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모본왕은 사람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이 있으면 활을 당겨 쏘기도 했습니다. 두로란 자도 왕을 모시던 자의 한 사람으로 늘 왕에게 죽임을 당할까 걱정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모본왕이 죽으면 그도 묻힐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두로(杜魯)가 왕을 시(弑)하였다. 두로는 모본인(慕本人)으로, 왕의 좌우에 시측(侍側)하고 있었는데, 해(害)를 입을까 염려하여 통곡하였다. 누가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를 무휼(撫恤)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 그대는 도모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어느 날 두로는 모본왕이 자신을 끌어당겨 앉으려 하자 품속에 있던 칼을 꺼내서 단칼에 왕의 목을 쳐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로 두로가 처벌받았다는 내용이 없는데요. 두로를 사주해 모본왕을 죽이게 한 인물이 부여태후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니 이 때문에 모본왕이 정말 폭군이었는지도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모본왕이 죽자 다음 왕이 누가 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쏠렸겠지만 애초부터 두로가 부여태후의 사주를 받아 모본왕을 죽었다면 후계자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모본왕은 6년 전에 자신의 아들 익을 태자로 삼아 자신이 죽으면 다음 왕이 될 사람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왕위계승 1순위는 당연히 모본왕의 아들이자 태자인 익이었지만 그는 재목이 아니라며 다른 사람을 추대합니다. 그는 아직 7세밖에 되지 않은 어수라는 아이였습니다.
‘모본왕이 돌아가시고 태자가 불초(不肖)하여 족히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지 못하겠으므로 나라 사람이 궁(宮)을 맞이하여 세운 것이다. 왕은 나면서 능히 눈을 뜨고 볼 줄 알았고 어려서도 출중하였으나 (이때) 나이 7세이므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삼국사기』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입니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재사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재사가 자신이 나이가 많으므로 아들에게 양보하는데요. 따지고 보면 재사는 유리명왕의 아들이고 대무신왕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대무신왕이 서기 4년에 태어났고 나이가 많아서 재사가 그의 아들에게 양보했다고 하였으니 재사가 바로 다음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서기 53년에는 48세가 됩니다. 한편 유리명왕이 죽은 서기 1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때 나이 36세입니다. 왕이 되기에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닙니다. 재사는 태조대왕을 낳고 나서도 24년 뒤에는 차대왕을 낳았고 19년 뒤에는 신대왕을 낳았습니다. 사람 앞일이야 알 수 없지만 72세까지 재사가 살았습니다. 가령 고대이들의 수명이 현대인보다 현저하게 짧았고 따라서 재사가 왕위를 잇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더라도 30대 중반에서 40대에 이르는 나이가 정말 자신의 7살 난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할 정도로 많은 나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재사를 제챠두고 7살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오르자 정치의 실권을 잡은 것은 그의 어머니의 부여태후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사 최초의 수렴청정이기도 한 부여태후의 섭정은 부여태후의 남편이 왕이 아니었음에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은 살아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본왕이 죽게 된 것은 바로 부여태후의 음모였을 것입니다. 모본왕 시기인 서기 49년에는 장수를 보내어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기습하여 후한을 떨게 한 사건도 있었는데 어쩌면 이러한 대외정책과 모본왕의 죽음이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부여인 태후의 성씨는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부여 왕실의 여자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근거가 없고, 『삼국사기』에 다만 ‘부여인’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명칭을 ‘부여태후’라 부르는 것입니다.
부여태후가 수렴청정했다는 것은 대무신왕 때 회복된 왕권이 민중왕과 모본왕의 두 대를 거치면서 다시 약화되자, 왕의 외척 세력이 실제 정치 전면으로 나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여태후는 태조대왕이 14세, 즉 재위 7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수렴청정 7년 동안 부여태후는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태조대왕 재위 3년 2월에는 요서(遼西)를 쳐서 10성을 쌓았으며, 4년 7월에는 동옥저(東沃沮)를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동옥저인들이 노비처럼 대우 받았지만, 점차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어 갔고, 고구려의 든든한 후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당시 고구려 국경이 서로는 요서에서, 북으로는 부여까지, 그리고 동으로는 창해(滄海·지금의 東海)에 다다르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지금의 淸川江)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여태후가 노력한 끝에 고구려는 동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청천강, 북으로는 부여국, 서로는 요서 지방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일설에는 부여태후 시기에 요서를 공략했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그렇게 충분치 않았다라는 것인데요. 기마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고구려는 빠르고 날쌘 기병대가 있었으며, 거리상으로 볼 때 속전속결의 전략으로 나가면 요서 공략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요서를 공략이라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단지 추측이라는 점에 그 문제가 있습니다.
부여태후는 한국사 최초의 태후로 기록되고 있는데요. 태후는 죽은 황제의 생존한 황후라고 합니다. 물론 이를 통해 고구려가 태조왕 시기에도 과연 황제국을 표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여태후가 섭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높았던 고구려의 여성지위 때문일텐데요. 고구려 여인들은 길쌈과 농사짓기뿐만 아니라, 장사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편의 지위와 상관없이 수렴청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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