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태조왕은 어떻게 94년간 재위했을까

2023. 8. 31. 19:5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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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대 태조왕은 자그마치 94년을 왕위에 있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는 나이가 119세였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서 자료를 가져오면 태조왕의 재위기간은 순위는 떨어지게 됩니다. 치우천왕은 151세를 살고 109년을 통치했다고 합니다. 역대 환웅 중 재위 107년, 105년도 있고 90년 이상은 보통이라고 하니 이러한 연대 기록은 기록한 책에 대한 진위여부를 의심케 합니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이 98세를 살며 78년을 다스렸고 그 밖에 우리나라 역대 왕들을 살펴보면 신라 진평왕(재위 53년), 백제 고이왕(52년), 고려 고종(46년), 조선 영조(53년)가 각 왕조를 대표하는 오랫동안 왕 자리를 지킨 왕입니다. 반면 고구려 6대 태조왕은 119세를 살고 93년을 재위했다고 하나 의문점이 많습니다.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에 이어 후손 궁에 이르렀다.’ 『위서』

여기서 막래는 모본왕의 말하고 궁은 태조대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대로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는 모본왕과 태조왕 사이에 몇 명의 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에 관한 문제는 태조왕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차대왕은 71년에 태어나서 7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에 태어나서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태조왕은 47년생입니다. 형제간의 나이차가 42년 정도 벌어지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이복형제라고 볼 수도 있으며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거나 혹은 각각 아들 그리고 손자인데 잘못 기록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추정하는 데에는 태조왕의 아버지인 고재사가 연로하다고 왕위 자리를 사양하고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도 좀 그런 것이 따져 봐도 재사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니라는 추정과 당시 왕위 상속은 부자상속이 아닌 형제상속이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재사가 살아있음에도 그의 부인이 어린 태조왕을 대신하여 섭정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고재사가 왕위에 있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록되지 못하고 그의 왕위 재위 기간이 태조왕과 합쳐진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할 뿐입니다. 또한 아버지 재사의 연령 문제에 관해서는 태조대왕부터 해씨가 아닌 고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을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된 점 등을 들어 태조대왕은 사실 유리명왕과 혈연관계가 없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이며, 이전의 왕과 무리하게 혈연관계를 주장하다가 설정오류가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그리고 해씨고구려설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고구려 초기 군주들의 성은 해(解)씨였으나, 이후 고(高)씨로 교체되었다는 가설인데요. 삼국유사에는 동명성왕이 성을 고(高)로 정하기 전에는 본래 해(解)였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유리왕, 대무신왕, 민중왕 부분에서는 성을 해씨(解氏)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초기 고구려 왕족들은 유달리 이름에 해(解)자가 자주 들어가는데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민중왕은 해색주(解色朱), 모본왕은 해우(解憂) 혹은 해애루(解愛婁), 소수림왕은 소해주류왕 혹은 해미류왕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리명왕의 아들 중에는 해명태자(解明)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바로 해모수입니다. 따라서 본래 고구려의 국성은 해씨였으나 나중에 고씨에 의해서 역성혁명이 일어났고, 고씨 왕가가 전대의 왕들까지 소급하여 기록을 조작, 해씨를 고씨로 고쳐놓았다는 주장이 해씨 고구려설입니다.  모본왕이 석연치 않은 암살을 당한 후 왕위에 오른 태조대왕이 '태조'라는 시호를 부여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본왕은 해씨의 마지막 왕이고 태조왕은 고씨의 첫 번째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중기의 왕인 소수림왕의 또 다른 왕호가 소해주류왕 또는 해미류왕인데, 해씨에서 고씨로 역성혁명이 일어났다기보다는 해씨=고씨라는 것이 학계의 다수 의견입니다. 대체적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추모왕부터 이미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이 계루부로 넘어갔으며 동명왕묘가 있는 오녀산성은 계루부에 속하는데 애초에 연노부에서 왕이 나오기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고구려에서도 왕가 교체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해씨도 계루부 소속이라 계루부 내의 긴밀한 친척 관계였던 왕가 내 분파 사이의 교체일 가능성이 훨씬 높으며, 고대 동북아시아에서는 같은 부계 계통이라도 거리가 너무 멀어지거나 할 때 성씨를 달리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태조왕이 정말 고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여전히 확정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후한서』에는  121년 태조대왕 사망했다고 하니 이 기록을 신뢰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출생연도는 정하기가 사망시기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태조왕의 아우는 수성입니다. 그리고 태조왕과 수성의 아버지는 재사입니다. 앞서 이야기에서도 재사가 왕이 될 수 있는 자리였으나 태조왕에게 양보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왕위 형제상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태조왕 80년째에 왕제 수성은 사냥 가서 연회를 즐기다가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측근들이 모본왕이 죽었을 때도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가 왕자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하자 아들에게 사양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양위하라는 뜻이니 태조왕은 나이가 많음에도 왕위를 양위할 생각이 없으니 이는 잘못이라고 수성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수성은 사양하는데 이유는 태조왕이 늙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성의 만류에도 측근들이 찬탈을 종용하자 이를 접한 목도루는 수성이 딴 마음을 품었음을 알고 병을 칭하여 칩거했는데 목도루는 그가 왕위 될만한 재목은 아니라고 판단 한 것입니다. 147년 음력 7월 수성이 왕위를 승계 받고 2년이 지난 때에 나이가 많고 병이 있다는 사유로 좌보에서 물러났습니다. 수성이 왕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것은 태조왕 재위 94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46년 7월 수성은 왜산 밑에서 사냥을 나가 측근들에게 왕위를 찬탈하고 싶은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이에 그를 보좌하던 신하들이 그를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대왕이 현명하므로 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간사한 신하들의 말을 들어 왕위를 노리며 화를 입을 것이고 마음을 고쳐 임금을 섬긴다면 태조왕이 그 마음을 헤아려 왕위를 사양할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직언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수성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측근들은 우리의 계획이 탄로날 것 같으니 그 말을 한 사람을 죽이자고 합니다. 그에 따라 태조왕을 폐하는 것을 반대한 신하는 제거당했습니다. 
태조왕 94년 10월 우보 고복장은 태조왕에게 수성이 반란을 꾀한다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태조왕은 이에 대해 자신은 늙었으니 왕위를 수성에게 물려주는 것이 맞다고 하며 왕위를 물려주고는 별궁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 때가 태조가 100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수성은 76살의 나이였습니다. 대왕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차대왕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미유, 어지류, 양신은 특히 높은 벼슬을 받았고 관나부 우태 미유는 그간 패자의 관등으로 올라 있었지만, 차대왕이 등극한 이후에는 최고의 관직인 좌보에 임명되었고  환나부 우태 어지류는 좌보 직위와 함께 대주부가 되어 국가의 재정을 책임졌습니다. 비류나부 양신은 중외대부가 되었고, 조의라는 낮은 관등에서 우태 관등으로 올랐습니다. 하지만 태조왕에게 수성의 반란을 이야기한 고복장은 수성이 왕이 된지 2달이 지나지 않아 잡혀 죽었습니다. 차대왕은 눈엣가시 같았던 태조왕의 원자 막근을 주살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그 동생 막덕 역시 대들보에 목을 매 스스로 마감했습니다. 수성이 차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조왕이 즉위 후 동옥저와 갈사국을 점령하고 재위 46년에는 책성을 순수하는 영토확장을 해왔는데 이러한 것은 강력한 왕권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계루부의 정통성을 이은 태조왕은 5부 체제를 왕권체제 밑에 두려했을 것이며 그렇게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다른 부들이 태조대왕의 수성을 부추겨 왕위를 찬탈하려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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