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들의 사냥 유목민과 닮았나
2023. 9. 4. 20:0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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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처음 건국한 지역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초기 고구려는 농사와 함께, 수렵과 방목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지만, 수렵이 중요한 산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또 넓은 초원도 갖지 못했기에 대규모로 가축을 기를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고구려인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습니다.
‘호구가 3만이 되고 이곳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넒은 곳이 없다. (…) 좋은 밭이 없어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백성들은 구복을 채울 수 없다.’ 『삼국지』「고구려전」
초기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유목민들은 가축을 기르며 살 수 있었지만 고구려인들은 그러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냥하며 살았습니다. 이는 확률이 떨어지는 작업이었습니다. 벽화 속의 고구려인처럼 사냥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사슴이나 영양을 사냥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이보다 작은 짐승을 잡아야 했을 텐데 하지만 이러한 동물들은 고구려인들만이 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작은 짐승들은 상위포식동물들에게도 표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인에게 사냥을 일상이었고 이것은 왕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왕의 사냥에 대해 신하가 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재위 22년(서기 3)에도 질산에서 사냥하며 5일 넘게 자리를 비우니 보다 못해 대보(大輔) 협보가 임금의 허물을 간한 것인데요.
‘왕께서 최근에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치안을 비롯해 국정을 부지런히 돌봐야 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말 타고 사냥 나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허물을 고쳐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질 것입니다. 신은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유리왕은 전 해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國內, 중국 지린성 지안)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고역을 치른 터라 민생을 세심히 살펴야 했습니다. 새 도읍이 아직 어수선해 치안에 각별히 유념해야 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임금이 사냥을 다니느라 자리를 오래 비우다니 이에 대해 원로대신이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유리왕은 노발대발하며 협보의 관직을 박탈하고 장원 관리인으로 보내버립니다. 협보는 오이·마리와 함께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곁에서 도운 창업공신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樂浪)이라는 산에서 왕과 신하들이 사냥하는데, 돼지와 사슴을 잡고는 천신(天神)과 산신(山神)과 개울신(川神)을 위해 제사 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 벽화로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수렵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도 고구려인들의 사냥사랑을 적어 넣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사냥을 즐겨했던 것은 고구려가 산세가 험했던 것도 이유이기도 하지만 고대국가에서 사냥은 그저 여흥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산은 수많은 동물과 새들과 나무들이 사는 신비로운 장소이며 숲에서 잡은 동물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적에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천손임을 확인하였고 이에 더해 사냥을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활용했습니다.
‘24년(5) 가을 9월에 왕이 기산 들판에서 사냥하다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양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羽氏)라는 성씨를 주고, 왕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삼국사기』 유리왕
‘ 가을 9월에 왕이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령스러운 말[神馬]을 얻어 이름을 거루(駏䮫)라 하였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3년(46) 가을 7월에 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삼국사기』
물론 이러한 사냥이 고구려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백제, 신라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삼국사기』에서 삼국 중 고구려본기에서 확인되는 것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인이 남겨놓은 수렵도를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요. 유목민들과 인접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했던 고구려인들은 씨름, 활쏘기 그리고 사냥을 통해 강한 전사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담아낸 해당 벽화에서는 발걸이(등자)를 찬 고구려 기마전사는 사냥개와 함께 호랑이를 사냥합니다. 전사가 겨눈 화살 끝은 뭉툭해서 실제 호랑이를 죽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보통 유라시아 일대 사냥도를 보면 사람을 향해 입을 벌리고 공격하는 호랑이에게 맞서 화살을 겨누는 장면이 대부분이나 고구려의 수렵도에서는 고구려인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입니다. 설마 이 호랑이가 야생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수렵도 위쪽에는 도망가는 사슴을 파르티안 사법(등 뒤로 돌아서 화살을 쏘는 기법)으로 겨누는 전사가 있습니다. 도망가는 사슴을 쫓아가며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달려가며 굳이 뒤를 돌아 활을 쏘려는 모습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이는 실제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을 연습하는 고구려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뒤로 돌아 활을 쏘는 파르티안 사법이나 고구려 벽화 속 씨름은 흉노와 중앙아시아에서 널리 행해졌던 것인데요. 고구려가 만주를 무대로 강력한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유목민들의 생활습성과 전술들을 받아들인 것도 한 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상고시대부터 유목민족은 농경민인 한족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약탈합. 유목민이 한족을 침범하고 약탈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급자족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농경민인 한족에게 침범과 약탈이었던 것이 유목민에게는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유목민과 교류하면서 이러한 약탈경제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불리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겨났는지 아니면 이 두 가지 모두 이유가 되어 고구려로 하여금 주변 나라로 약탈을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건국 시조은 추모왕은 이름이 주몽이라 불렸으며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말을 키우는 말을 했는데 이러한 모습은 바로 유목민의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생활에서 유모민의 일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10배 혹은 12배를 보상한다는 법이 있는데 이는 부여, 백, 실위, 돌궐, 여진 등에서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취수제 혹은 형사취수제는 아버지나 형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자신의 생모를 제외한 처첩을 상속받는 수계와 비슷한 것으로 유몬민 사회에서 살필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음력 정월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했는데, 요동태수 제동이 은덕과 신의로 달래자 다시 화친을 맺었다.’ 『후한서』 「광무제기」 건무 -25년(49년) 조-
이를 두고 고구려의 모본왕이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를 지배하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고구려는 요동, 현도, 요서 등의 군을 지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가 요동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후한서의 기록을 토대로 오늘날 중국 산서성 및 하북성 북부지역을 지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당시 『후한서』에 기록된 고구려 모본왕의 침입기사를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 하지만 여기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고구려가 침입을 했다는 것이지 이를 해당지역에 대해 지배를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약일 수밖에 없는데요. 요동태수 제동의 은덕과 신의 때문에 고구려가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침공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영토확장이 아닌 물자를 얻기 위함입니다. 고구려 초기는 북아시아 유목민들과 유사한 면이 있었고 척박했던 자연환경 탓에 다른 나라에 침입하여 물자를 얻었습니다. 중국에 복속한다는 형식적인 의례를 지내고나서 고구려와 선비족들은 중국으로부터 더 풍족한 물자를 약속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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