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파소가 진대법을 건의했을까

2023. 9. 5. 20:0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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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대법(賑貸法)은 194년 고구려에서 실시된 구휼 제도입니다. 흉년기나, 춘궁기에 국가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곡을 대여해 주고 수확기인 10월 즈음에 낮은 이자를 쳐 갚게 한(춘대추납) 제도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빈민구제법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 제도는 식구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 있게 빌려준 제도였습니다. 진대법을 실시할 때의 왕은 고국천왕입니다. 
‘12년(190) 가을 9월에 경도(京都)에 눈이 6척이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인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인 좌가려(左可慮) 등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였으며,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그들을〕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였다.’ 『삼국사기』
190년에 연나부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고국천왕 6년(184) 한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니 왕자 계수를 파견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베어버린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 때 고국천왕은 왕자 계수로 하여금 막게 했는데 이것이 연나부의 반감을 샀다고 합니다. 연나부가 당시 실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연나부는 오부 중에서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계루부 왕실이 연나부의 귀족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었던 것은 연나부 세력과 연합하여 오부내의 여타 세력들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력과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국천왕도 연나부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연나부출신 우소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왕비까지 배출한 연나부는 더욱 힘이 커졌고 우 씨 왕후의 친척 가운데 어비류와 좌가려는 연나부의 귀족이란 배경을 믿고 나라의 법을 어기고, 남의 자식들과 집과 밭을 자기 마음대로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연나부의 힘이 강하게 된 것은 신대왕의 즉위와 관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연나부의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추대한 것입니다. 신대왕이 즉위하고 나서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삼았습니다. 명림답부는 해당 관직을 맡음으로써 군사에 관한 전권을 넘겨받았고 이것은 명림답부 개인이 아닌 연나부에게 그 권한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쳐들어왔을 때 고국천왕은 이들을 연나부가 아닌 고국천왕의 동생 계수로 하여금 막게 한 것인데요. 이 일로 계루부와 연나부는 갈등을 빚게 됩니다. 연나부 입장에서는 권력을 계루부가 독차지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재위 12년에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어 그 자제들이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남의 자녀들을 약탈하고 백성의 토지와 집을 빼앗으니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국천왕은 분개하였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어비류와 좌가려 등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어 선수를 치려합니다. 그리고 이른 바 사연나라고 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연나부 내에는 4가가 있는데 이들이 연나부를 다스렸고 당시에는 반란세력이 된 것입니다. 

재위 13년 좌가려가 군사를 모아 왕경을 공격하니 왕이 지방의 군사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진압했습니다. 반란을 평정하고 왕이 말하기를 ‘근자에 벼슬은 정실에 의하여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으므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나의 왕실을 동요시키니 이것은 내가 정치에 밝지 못한 탓이다. 너의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하부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이에 4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니 왕이 안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안류는 고국천왕이 국정을 맡기려하자 이를 사양하고 다른 사람을 추천합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중대한 나랏일을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손자인데 그의 성질이 굳세고 지혜가 깊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하므로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하고 있으니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실진대 이 사람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왕은 이에 을파소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일을 맡기려 했으나 을파소는 이를 사양합니다. 그는 본래부터 큰 그릇이었던지라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에는 우태라는 벼슬은 작았던 것입니다. 이에 을파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이 노둔하여 감히 엄명을 받들기 어려우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고관을 삼음으로써 대업을 이루게 하소서.‘
이에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자리를 주었습니다. 당시 을파소는 어떠한 부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을파소가 선대왕 시절 대신을 지냈던 가문의 손자였다고 하지만 을파소는 평민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국천왕은 기존의 나부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인물을 중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고 을파소는 그에 걸맞는 인물이었습니다. 
‘(을파소가 국상으로 임명되자) 근신과 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 대신들을 이간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귀한 자나 천한 자나 할 것 없이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리라’ 하였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믿고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을파소는 국상으로서 정무를 처리하여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옛날에 명철한 제왕들은 현명한 자에 대하여 처지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여 의심을 두지 않았다. … 이제 왕이 당연히 용단을 내려 을파소를 바닷가 벽지에서 발탁하여 여러 사람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백관의 윗자리에 등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옛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했다고 할 만하다.’ -김부식-

‘재위 16년,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서 곡식들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하다가 길에 앉아서 우는 자를 보고 어찌하여 우는가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을 팔아 어머님을 봉양하여 왔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를 할 곳이 없으므로 곡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웁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슬프다!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막다른 골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무한 다음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들에 명령하였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제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광범위하게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 사이 관가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 있게 꾸어주었다가 겨울 10월에 가서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니 경향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농사꾼이었던 을파소는 백성들의 궁핍한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 대의 국상이었던 을파소가 진대법을 건의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민중왕 2년에 ‘여름 5월에 나라의 동부지역에 큰물이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고 하거나 태조대왕 66년에 “해당 관청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으니 아마 을파소가 진대법이 법제화되고 시행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산상왕 7년 을파소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통곡했다는 기록은 을파소가 국상으로서 현대인에게도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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