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장수가 고구려왕이 될 수 있던 이유

2023. 9. 6. 20:0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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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13대 왕은 서천왕이었습니다. 서천왕은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서천왕은 자신의 동생을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동생들은 일우와 소발이었는데요. 형제 소발과 일우는 병을 핑계삼아 부하들과 함께 온천으로 가서는 그 곳에서 연회를 베푸는 한편 무리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반계획은 서천왕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천왕은 재상 벼슬을 내린다고 두 사람을 속여 불렀으니 궁으로 들어갔다가 서천왕이 숨겨두었던 장사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292년 서천왕이 죽자, 상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14대 봉상왕이 되었습니다. 서천왕과는 달리 봉상왕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습니다. 봉상왕의 유년 시절에 대해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했으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고 기록해서 어린 시절부터 폭군의 기질이 보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고대사의 기록이고 그가 폭군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숙부나 동생을 처형한 기록이 있으나 이는 왕의 자리에 있으면 주변의 인물을 의심하여 처단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이를 가지고 그를 폭군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죽인 사람 중 달가는 서천왕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280년 고구려북쪽으로 쳐들어온 숙신을 정벌한 영웅입니다.
‘20년(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당시 달가는 패자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패자는 고구려 초기의 관등으로 10개 관명 가운데 세 번째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패자에 대한 기술은 차이가 있으나 패자는 본래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이를 동원할 수 있는 나부의 지배세력에게 수여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군사권도 맡겼습니다. 안국군이라는 말도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제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달가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왕실에서도 무시못할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이 달가를 라이벌로 인식했습니다.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安國君) 달가(逹賈)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과 업적이 있어 백성이 우러러보자, 그를 의심하여 음모를 꾸며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梁貊), 숙신(肅愼)의 난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 조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삼국사기』
이렇게 왕이 되자마자 봉상왕은 달가를 제거하였습니다. 
‘〔2년(293)〕 9월에 왕이 그 아우 돌고(咄固)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여겨 이를 애통해 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성 밖[野]으로 나아가 달아났다.’ 『삼국사기』
봉상왕은 왜 작은 아버지와 자신의 아우를 죽게 했을까. 봉상왕은 이러한 정적 제거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려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봉상왕시기에는 모용외가 침입하였습니다. 때는 293년으로 이 일로 봉상왕은 도읍을 떠나서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용외는 봉상왕을 추격하여 위험한 상황에 빠뜨렸습니다. 이때 신성에서 북부소형의 벼슬을 지내던 고노자가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가 왕의 행렬을 추격해오던 모용선비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하였습니다. 결국 모용외의 군사는 고노자에게 패하여 물러났고, 왕은 고노자의 공로를 인정하여 벼슬을 북부대형으로 올려주었으며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296년, 모용외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서천왕의 무덤이 도굴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국상 창조리를 고노자를 추천하였습니다. 봉상왕은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의 태수에 봉하였습니다. 고노자는 신성에서 백성들을 잘 보살펴 선정을 베푸는 한편 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위세와 명성을 떨쳤다고 하며 이후 모용외의 침략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이러한 고노자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봉상왕 7년 (298년) 9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이 죽고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그리고 10월에는 궁실을 증축했습니다. 이에 대해 군신들이 문제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한편 봉상왕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고 있었습니다. 11월에 그를 제거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봉상왕 9년 (300) 정월에는 지진이 있었고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더욱 안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8월 왕은 국내 열다섯 살 이상 먹은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고 이로 인해 유랑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국상 창조리(생몰년 미상)가 ‘공사중단’을 간언하고 나서자 봉상왕은 “임금인 내가 마음대로 한다는 데 웬 잔말이냐”고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까닭이 뭔가. 백성들에게 칭찬을 얻기 위한 것이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봉상왕조」
이에 더 이상 창조리는 봉상왕을 모시기 힘들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군신들과 회의하고 을불을 맞이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을불은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을불은  음모(陰牟)의 집에서 고용살이했는데 음모는 늪에 개구리가 울면, 을불을 시켜 밤에 기와와 돌을 던져 그 소리가 안 나도록 하고, 낮에는 그를 독촉해 땔나무를 하도록 하였으니 견디다 못한 을불은 1년이 되자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 장수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기 위해 소금 한 말을 주었는데 이에 할멈이 더 달라고 하자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할멈이 을불의 짐 속에 자신의 신을 숨겨놓고는 압록재에게 고하여 매를 맞게 하였습니다. 이에 몸과 얼굴이 야위고 의상은 남루하였으니, 다른 사람이 그를 보아도 그가 왕손(王孫)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국상 창조리는 봉상왕을 폐하도록 하고 을불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비류하 강가에서 한 장부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용모가 비록 초췌하나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을불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잡아떼었으나 소우 등이 다시 한 번 청을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을불이 받아들여 모시고 오자 창조리가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봉상왕이 9월에 후산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는데 창조리가 따라나섰습니다. 이 때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가 뒤따르던 사람들에게 마음을 같이하는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하면서, 갈대잎(蘆葉)을 모자에 꽂으니 사람들도 모두 따랐으므로, 마침내 왕을 폐하고 미천왕을 옹립하였습니다. 
한편 10대 산상왕에서 14대 봉상왕에 이르기까지 동천왕을 제외하고 모두 형제 혹은 동생을 죽였다고 합니다. 산상왕시기에는 그의 형인 발기가 왕이 되지 못해 공손탁으로부터 군사 3만을 얻어 고구려를 쳤고 이에 막내동생 계수가 나서 막았습니다. 이 싸움으로 인해 형 발기는 자살하였습니다. 중천왕은 그의 동생 예물과 사구가 반역을 꾀한다는 이유로 제거하고 봉상왕은 동생 돌고를 죽이고 그의 아들 을불까지 노렸습니다. 6대 태조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이 왕위 계승이 형제간에 왕위가 이어진 것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계승방법은 고재사를 시조로하는 가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1대 동명왕부터 3대 대무신왕대까지는 부자상속으로 이루어졌잖아요. 고구려는 왕위를 부자상속으로 이을 것인지 형제상속으로 이을 것인지 정치적으로 갈등을 빚게 되고 그 과정에서 희생이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자상속으로 결정되며 고구려의 왕권은 더욱 안정화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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