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의 불교수용

2023. 9. 9. 11:1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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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17대왕은 소수림왕입니다. 태자 시절의 이름은 구부(丘夫)로 추정되며 고국원왕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전 왕인 고국원왕은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전연의 침략을 겪었고 백제와 전투를 하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림왕 이후로 왕위를 이은 군주 중에 광개토대왕이 있으니 소수림왕은 이후의 전성기를 활짝 열 수 있도록 주춧돌 역할을 한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소수림왕은 부왕의 팽창정책 실패로 인한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 일련의 체제 정비에 나섰습니다. 불교를 수용하고 보급하기 위해 전진의 승려 순도와 아도를 맞아들였고,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해 유교이념의 확대를 꾀했습니다. 또한 국가 통치의 기본법인 율령을 반포하여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4세기말∼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를 가져오는 기틀이 된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 대륙쪽으로는 전진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오호십육국시대에 티베트계 저족이 세운 국가로 국호는 진(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아 가장 먼저 나타난 이 국가를 전진(前秦)이라고 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진은 이미 고국원왕 대에 인연을 맺은 바 있습니다.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간신 모용평을 묶어 전진으로 압송시킨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수림왕 시기에도 고구려는 전진과 중요한 인연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입니다. 372년 소수림왕 2년에 전진의 부견왕이 사신과 함께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 감사드리고 방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5년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그곳에)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그곳에)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이다.’ 『삼국사기』

374년에 승려 아도가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초문사라는 절을 지어 순도를 머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왕실에서 불교를 환영한 것은 이때지만 아마 그 이전부터 고구려인들은 불교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고국양왕 대에 국가의 명에 의해 신봉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구려에는 많은 신앙이 있었지만 왕실이 불교를 인정함으로써 많은 신앙 중에 불교가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수림왕 시기에 이미 승려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승려들은 국왕의 지원을 받았으며 때로는 국왕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전진으로부터 승려 순도를 받아들였고 374년에는 동진이 고구려에 아도를 고구려에 파견합니다. 중국 남북의 두 왕조가 거의 같은 시기에 승려를 파견한 것입니다. 고구려가 남북 두 왕조에서 온 승려를 위해 각각 사찰을 건립합니다. 당시 중국은 5호16국이 연립했던 북부와 낙양에서 건업(현재 남경)으로 피난 온 한족의 동진이 지배하던 남부로 나뉘어 일종의 체제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왕조들은 상대해여 하는 국가의 배후세력과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국경을 맞댄 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보다 먼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협공하려는 태도를 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방편으로 승려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들을 위해 사찰을 건립합니다. 
당시 한족의 남조보다 북조가 더 불법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불법이라는 것도 인도에서 왔고 인도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질병 치료와 신이한 능력을 보이면서 교세를 화장했던 것인데요. 북조 입장에서는 한족이 만든 유학보다는 이 불법이 더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북조는 이러한 불법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동진 장군 환온(312~373)은 잃어버린 낙양을 되찾기 위해 354~359년 세 차례나 북벌을 단행해 전연과 전쟁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염병도 오기 마련인지라 이때 역병이 발생해 죽은이가 10명 중 4~5명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중국은 남조와 북조가 경쟁하면서도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것입니다. 
‘소수림왕 7년(377) 겨울 10월에 눈이 오지 않고 천둥이 쳤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다’ 『삼국사기』
당시 역병이 왜 돌았을까요. 그 이전에 고구려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건립하여 각각 아도와 순도를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요. 하지만 당시 고구려에게 불교사찰을 건립할 수 있는 건축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의 절은 지은 이들은 전진과 동진에서 온 기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전진과 동진에서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다지기 위해 승려를 보낸 것인데요. 고구려가 중국과 교류가 활발하던 4세기 당시 중국엔 역병이 만연했습니다. 낙양을 수도로 하던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어주고 317년 남쪽 양자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던 동진의 경우 429년 멸망 전까지 112년 사이 11회나 역병이 발생한 것인데, 동진은 남쪽으로 천도한 이래 역병에 시달리다 사라져간 왕조였던 것입니다. 전진의 경우도 전쟁을 끊임없이 지속하였기에 역병이 유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377년 고구려 역병이 돈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병이 오히려 불교를 믿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를 믿던 중국계 사람들은 본토에서 여러 차례 겪었던 질병이라 별 탈이 없었으나 불교를 처음 접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 면역력이 없던 고구려인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이미 믿고 있었던 중국의 기술자들은 이미 그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 지라 큰 탈이 없었고 이로 인해 역병을 겪으며 고생한 고구려인들이 불교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럼 고구려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국원왕이 죽은 이후 고구려는 쇄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도는  위나라 굴마(堀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의 아들이라고 『삼국유사』에서는 전하고 있는데요. 고국원왕 시기에 굴마와 접촉하여 호국불교의 수용을 받아들이고자 했지만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그 시기는 더욱 늦추어지게 됩니다. 
고구려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에 태학을 세웁니다. 태학이라는 것은  태학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재미있는 불교를 수용한 소수림왕이 유학덕목을 가르치는 태학을 비슷한 시기에 건립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적 이념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고구려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유학에서 충과 효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덕목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사회체제 유지는 율령반포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대 국가의 법률. ‘율’은 형벌 법규이고, ‘령’은 행정 법규를 말하는데요. 고구려는 중국 율령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뿌리는 부족국가 시대 이래의 법제를 계승, 발전시킨 형태의 고대법으로서 삼국사기에 소수림왕이 시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령의 반포는 소수림왕 대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초기부터 왕이 내렸던 각종 교령, 즉 명령ㅇ르 근거로 새롭게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안에는 관직과 관위에 대한 규정도 들어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왕권을 더욱 강화해 나갔고 정부조직을 재편해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체제기반으로 중국으로부터 그 문물을 직수입할 준비를 마련 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일련의 체제정비작업을 앞으로 올 고구려 전성기의 초석이 되어주었는데요. 여기에 더해 나라가 멸망할 수 있었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갔다는 점에서 소수림왕은 위대한 군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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