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연황제가 된 고구려후손 고운
2023. 9. 10. 11:2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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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은 모용준의 아들인 모용위(慕容暐)가 왕위에 오른 뒤에 국력이 급속히 쇠락해 370년(고국원왕 40)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멸망했습니다. 그 뒤 모용위를 비롯한 전연의 왕족들은 전진의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옮겨졌으며, 모용부의 세력은 전진에 복속해 동진과의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383년 부견이 동진을 공격하러 나섰다가 크게 패하자 전연의 왕족들은 곳곳에서 다시 연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가 세운 후연입니다. 후연은 정령족(丁零族)이 세운 적위(翟魏)를 멸망시키고, 산둥반도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으나 모용수가 죽고 그의 아들인 모용보(慕容寶)가 즉위한 뒤에 선비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북위(北魏)에 패하면서 396년 허베이성[河北省] 일대에서 쫓겨나 도읍을 요서의 용성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성(慕容盛)이 그를 죽이고 후연의 왕위에 오르니 그 때가 398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399년에는 모용성이 직접 고구려로 출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신성과 남소성이 잃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인 5천여 호가 잡혀갔습니다.
이후 후연에게 시련이 왔습니다. 북위가 후연의 뒤를 공격하였는데 401년의 일로 인해 후연은 영지를 함락당했습니다. 후연은 우문발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탈환하도록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다시 시도하여 성공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용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용성은 휘하 장수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그의 숙부인 모용희(慕容熙)가 후연의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고구려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400년 고구려는 남정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 일은 400년 광개토 대왕 때 고구려의 5만 군대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한 사건으로 이른바 신라구원작전이었습니다. 이 일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가야 제국 내에서 가락국이 쇠퇴하고 아라가야와 대가야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북위가 후연의 영지를 함락하자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곳으로 장수왕 대에도 요새로서 그 힘을 발휘한 곳입니다. 그리고 403년 11월 후연을 다시 공격합니다. 고구려는 이 때 요동을 얻었습니다. 이 지역은 서북쪽의 중원세력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404년에는 후연의 모용희가 반격했습니다.
‘14년(405) 봄 정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해왔다. 막 성을 함락시키려 하는데, 〔모용〕희가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기를,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짐(朕)이 황후와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군이〕성 안에서 방비를 엄히 할 수 있게 되어 〔후연의 군대가〕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모용희의 공격자제명령을 고구려로 하여금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야 했습니다. 모용희는 여러 가지로 군주로서 모자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요. 전쟁에 여자와 시종을 잔뜩 데려오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모용희는 일 개국의 군주로서 자질이 형편없이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06년에 거란을 약탈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생각보다 센 거란의 저항에 당황하였습니다. 이에 철군하기로 하였는데 이에 모용희가 총애하던 부소의가 군대를 왜 돌리냐며 투정을 부렸고 고구려로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있는 최전성기 시절이었는데 모용희는 상황판단을 못하고 여자의 말을 듣고는 고구려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먼 길을 가야하는 것을 알아서일까. 고구려를 치러가면서 무거운 짐을 다 버리고 가벼이하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너무 지쳐있었고 추위가 찾아와 많은 병사들이 동사했습니다.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략했지만 함락할 수 없었습니다. 자그마치 3,000여 리를 달려왔으니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407년 모용희가 수도를 비운 사이에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에는 풍발과 그의 종형 만니 등 22명이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용성의 북문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사로잡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풍발은 새로운 왕을 세우니 그가 바로 모용운이라는 사람입니다.
‘17년(408)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으로서 예를 베푸니, 북연왕 운(雲)註 002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지파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이라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자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을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고 모용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삼국사기』
고운(高雲) 또는 모용운(慕容雲)으로 불리며, 자는 자우(子雨)라고 합니다. 그의 조상은 고국원왕 때 전연에 끌려간 고구려 귀족이며, 할아버지는 고화(高和)입니다. 아마 342년에 모용황이 고구려수도 국내성을 점령했을 때 그의 선조가 중국으로 끌려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운은 후연의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을 때, 무예급사(武藝給事)로 동궁(東宮)을 시위하다가 그의 신임을 얻어 양자가 되고 모용씨를 사성받았습니다. 모용희(慕容熙)의 폭정이 갈수록 심해지자, 풍발(馮跋) 등이 모용희를 죽이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407년 천왕(天王)에 즉위한 뒤 고씨로 복성(復姓)하고 정시(正始)로 개원하는 한편 국호를 대연(大燕)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으며 종족으로서의 유대감을 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 데에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고운은 황제가 될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멍청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그가 황제가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술실력만큼은 탁월했습니다. 397년 탁발부의 군대가 후연의 수도 중산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 때 모용보를 구하러 온 것은 아들 모용회였습니다. 하지만 모용보는 아들보다 동생인 모용농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모용회는 태자도 되지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더욱 서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급기야 삼촌들인 모용농과 모용륭이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 하자 더욱 분노했습니다. 모용회는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모용륭을 제거하고 모용농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모용회는 아버지 모용보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모용보가 오히려 그를 부하를 시켜 몰래 죽이려하자 모용회는 달아났다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모용보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 때 고운이 결사대 백 명을 데리고 와서 모용회를 격파하는 공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모용보는 고운을 양자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용보는 살해되고 이후 모용성과 모용희가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모용희가 전횡과 폭정을 일삼자 풍발과 장흥의 무리들이 고운을 자신의 우두머리로 추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권력은 풍발에게 있었습니다. 고운은 천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천왕은 황제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전까지 주나라 왕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오호십육국시대에도 이 말은 사용되었고 천왕의 후계자는 태자라고 하였으니 실질적인 황제와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고운은 허수아비황제였습니다. 고운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힘센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반, 도인 등에게 친위대를 이끌게 하고 많은 재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고운을 살해한 것은 이 두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풍발이 있었습니다. 고운은 사후에 혜의황제로 추증되었습니다.
고구려 서방에서는 이렇게 정리되었습니다. 그렇게 407년 후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는 넓은 평야와 더불어 철의 중요 생산지, 교통의 요충지였던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후연을 상대하느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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