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왕
2023. 9. 8. 11:1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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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故國原王, ?~371)은 고구려 제1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31년~371년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천왕으로 미천왕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미천왕 시기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미천왕 대는 중국 진(晉)이 붕괴하고 5호 16국의 혼란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미천왕 대에는 요동지역으로 진출을 꾀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전연(前燕)과 크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고국원왕 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고국원왕 시기 중국 대륙 쪽에서는 모용선비가 고구려에게 가장 큰 적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미천왕 말기에는 모용선비를 견제하기 위해 후조의 왕인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어 큰 활을 선물하였습니다. 후조는 중국 5호16국 중의 하나로 갈족(羯族)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존속 기간은 319~350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후조에서는 338년에 이르러 선박 300척을 동원해서 30만 곡(斛)의 곡식을 고구려에 보내고, 군대를 동원해 모용황을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모용선비는 동진과 연합하여 후조를 견제하면서 그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339년에는 모용황이 후조를 도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에 대해 평화를 제안했고 모용선비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342년 모용선비는 수도를 극성에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중원으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모용황의 형인 모용한이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후환이 될 수 있는 고구려를 치자는 계획을 제안합니다. 모용선비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우문선비의 연합을 경계하였고 이를 이루어지지 않기 위해 고구려를 치기로 합니다.
고국원왕 12년(342) 11월. 모용황이 5만5000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쳐들어왔습니다. 연의 침공을 사전 탐지하고 있었던 고국원왕도 6만 대군을 일으켜 대응했습니다. 당시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습니다. 안좋은 기상여건 속에서 연에서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은 험준한 남도와 평탄한 북도 두 길이었습니다. 모용황은 책사의 묘략을 수용해 4만 군대 선봉에 서 남도를 먼저 공략합니다. 1만5000 병력은 북도에서 대기토록 했습니다. 허를 찌른 허허실실 전법으로 고국원왕은 당연히 모용선비군이 평탄한 북도를 먼저 공략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좁은 남쪽 길로 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고, 고구려의 협공을 받으면 쉽게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적군은 북쪽 길로 대군을 보내고, 남쪽 길로는 소수의 병사를 보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고국원왕은 이와 같은 작전계획에 따라 자신은 약졸을 거느리고 남도를 방어하러 가고, 북도에는 자신의 아우인 무로 하여금 정예병사 5만을 보내 막도록 하였습니다. 왕은 보충부대 1만을 이끌고 남도에서 기다렸습니다. 보충부대 안에는 태후와 왕비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해 11월 모용황은 자신이 직접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진격합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허를 찔렀지만 그럼에도 고구려의 장군 아불화도가가 선봉장이 되어 이를 막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선우량이 포로신분임에도 자신을 잘 대해준 모용선비에게 보답한다면서 몇몇 부하들과 함께 고구려 진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고구려의 군대는 이들의 갑작스런 공격에 흔들렸고 때를 놓치지 않고 모용황의 군대가 공격을 더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밀렸고 과정에서 고구려의 장수 아불화도가가 죽자 고구려군은 더욱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용선비 군대는 이같은 상승세를 타고 환도성까지 밀어 부쳤습니다. 한편 북도에서는 고구려의 정예부대가 모용선비 부대를 격파하고 환도성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수도 환도성이 모용황에게 함락되고 고국원왕은 근위병 몇 명과 피신해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승전한 모용황 군대는 연으로 철군하며 천인공노할 패악질을 자행했습니다. 미천왕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탈취했습니다. 이어 태후와 왕비를 백성 5만여 명과 함께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조정과 백성들은 절망했습니다. 고구려는 연의 신하국으로 전락해 군신 예의를 자청했고 30년이 넘도록 진귀한 공물을 헌납했습니다. 볼모로 인해 운신하지 못한 고국원왕은 연군의 침입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천왕이 확장한 요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습니다. 모용선비는 342년 우문선비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문선비의 왕 일두귀는 고구려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모용선비는 고구려 남소성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모용선비는 남소성을 점령하고 주둔하였으나 고구려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모용선비는 고구려가 위협이 되지 않음을 확인하자 적극적으로 강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곧 중원으로 진출해서 349년 황하 하류 일대를 장악하여 전연이 되었습니다. 355년 의 일입니다. 이 때에 전연은 고구려의 태후를 돌려보냈으니 13년만의 일입니다. 이후 고구려와 전연은 관계를 지속하지 않았고 370년 저족이 세운 전진은 북중국의 패권을 놓고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전연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에 전연의 태부 지위에 있던 모용평이 고구려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잡아서 전진에 보냈습니다. 이에 전진왕 부견은 그 2년 뒤인 소수림왕 2년(372)에 친선사절을 보내면서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어쨌든 전진과의 친선으로 고구려는 더 이상 서방으로의 진출은 꿈꿀 수 없었습니다. 대신 남쪽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남쪽에는 백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고국원왕의 고구려가 전진이 강성해짐에 따라 계획수정이 불가피한 가운데 근초고왕의 한성백제 역시 남쪽의 마한 세력을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든 상황이었기에 북쪽으로 확장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한사군이라는 두 세력 사이의 완충 지대가 사라진 시점에서 지금의 황해도~경기도의 넓은 평야 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고국원왕은 선수를 쳐 369년 9월, 노구를 이끌고 20,000명의 병력으로 백제 북방의 치양성을 공격하다가 백제의 태자 부여수에게 제대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군의 사기란 자가 몰래 백제군으로 도망을 쳤는데 사기는 본래 백제인이었습니다. 사기는 백제 태자 근구수에게 고구려 진영의 약점을 이야기합니다.
‘고구려 군대가 많기는 하지만, 대개는 머릿수를 채운 잡군에 불과합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붉은색 깃발을 든 부대뿐이니, 그들을 먼저 깨뜨리면 나머지 고구려군은 공격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하니 고구려의 주력군이 무너졌고 고구려군은 이 싸움에서 무려 5천여 명이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하지만 고국원왕은 다시 한 번 백제 공격을 명합니다. 371년의 일이었습니다.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출정시켜 백제군을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게 되어 이 달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이 때의 평양성은 북한학계에서는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성으로 상정한 다음 재령강 상류의 장수산성과 신원 도시유적 일대로 비정하지만 제반 자료를 종합하면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국의 들은 고국원왕의 장지이며 ‘국(國)’자는 ‘나라’나 ‘도성’을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도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의 일은 고구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화가 의미 없게 이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제'라는 말 대신 남을 잔(殘) 자를 써 '백잔(百殘)'이라는 멸칭을 사용했으며, 후대의 기록이 아닌 고구려인이 직접 새긴 광개토대왕릉비에도 해당 표현이 남아 있습니다. 고국원왕은 40년 이상 재위하면서 전연 그리고 백제에서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 고구려역사에 있어 오점으로 기억되고 있는데요. 이후 소수림왕 재정비기를 거쳐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기를 거치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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