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정복활동

2023. 9. 11. 11: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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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집안 지역에 세워진 것은 장수왕(長壽王) 2년(414)의 일입니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391년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대해 19세기말 일본학자들은  '도해파'의 주체를 왜(倭)로 보고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 근거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인보(鄭寅普), 박시형(朴時亨) 등 남북한 학계에서는 도해파의 주체를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 보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습니다. 물론 이 기사에 대해 과연 진실로 볼 것이냐하는 것도 문제로 제기될 수 있는데요. 당시 왜라는 존재가 있었고, 이들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의 왜는 백제나 신라를 정복할 만한 힘이 없었을 것을 보는데요. 다만 이 비문을 새기는 과정에서 내용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령 백제가 정말 고구려의 신민이었을까 하는 점에서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광개토대왕 이전 고국원왕은 이미 백제에게 패배해 싸움터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맞댄 것은 4세기초 낙랑군과 대방군을 고구려와 백제가 점령하고 난 뒤였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관계를 맺고 종속관계를 갖기는 힘들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내물왕과 실성왕 때에 질을 보내는 외교활동을 벌였지만 이를 신민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사실상 신묘년 기사에 대해 과장된 서술로 보고 있는데요. 이러한 것은 1980년대부터 한중일 학계에서 다수로 나타나는 경향으로 기사의 주체를 일본으로 파악하지만, 백제나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과장된 서술로 보는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설정한 것은 고구려의 전쟁 명분으로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만 비문의 내용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자의로 허구성을 상정하는 것은 무리수일 수 있습니다. 
‘영락(永樂) 5년 을미(395)에 왕은 패려(稗麗)가 [▨▨]인에 … 아니하므로,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였다.[왕의 군대가] 부산(富山)·부산(▼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렀다. 그 3개 부락 6~700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떼의 수가 매우 많았다. 이에 [왕이] 어가를 돌렸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후성(候城)·역성(力城)·북풍(北豊)·오비해(五備海)에 와서 영토와 경계를 둘러 살피고, 전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광개토대왕비문」
패려 혹은 비려를 토벌했다고 하며 돌아오는 길에 양평을 지납니다. 이곳은 현재 중국 요양시 서남쪽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패려라는 곳은 정확하게 비정할 수는 없으나 그곳에 거란이 살았고 아마 광개토대왕은 거란을 정벌하고 백성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이전 소수림왕시기인 378년에 거란이 쳐들어와 8개 부락을 함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영락] 6년 병신(396)에 왕이 몸소 …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영락 6년 고구려군의 공격범위는 대체로 예성강과 임진강·한강 유역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당시 백제의 아신왕은 항복하고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 때 58성 7백 촌을 얻고 백제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돌렸다고 합니다. 
‘[영락] 8년 무술에 [왕이] 교(敎)를 내려 소규모 부대를 보내 숙신(肅慎)註 039의 땅과 계곡을 살펴보게 하셨다. 이에 곧 막▨라성(莫▨羅城)·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로부터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하고 [나라의 일을] 상의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고구려의 동북쪽에는 숙신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98년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을 하고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숙신은 이전부터 고구려와 관계를 맺어왔고 서천왕은 숙신의 일부지역을 장악하고 조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9년 기해(399)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갔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고자 합니다. 왕께 귀의하니 구원해주시길 청합니다.”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그(신라왕)의 충성을 훌륭하게 여겨, 특별히 사신을 보내 돌아가게 하고, …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광개토대왕이 평양으로 순행하여 내려갔습니다. 신라왕이 노객을 자처하며 도움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가지고 신라의 백성들이 고구려의 신민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영락] 10년 경자(400)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가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의 군사]가 가득하였다.註 042 [고구려의]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400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합니다. 고구려군은 종발성에서 신라성까지 가득 차 있던 왜병을 궤멸시켰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399년, 401년, 403년, 404년에 연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연나라는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뺏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400년에 고구려는 과연 5만의 군사를 남정에 활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수 있고 실제로 남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왜구의 규모가 과연 5만이란 많은 병력을 동원해야 진압이 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의 군대를 동원했는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락] 14년 갑진(404)에 왜(倭)가 [법도를] 따르지 않고 대방(帶方)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 석성(石城) … 배가 연이어 … 하였다. … 왕당(王幢)이 요해처를 끊고 소탕하니, 왜구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비문」

404년에 왜가 대방에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왜는 정말 왜가 아니라 백제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전지왕이 즉위한 해가 405년이라고 하는데 같은 사료에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시기는 392년, 그런데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391년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404년은 전지왕이 즉위한 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때 대방에 출몰한 왜는 어쩌면 전지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백제로 귀환할 때에 호위하며 따라온 왜병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결국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백제란 나라에 대해서는 축소하고 왜를 과장한 것이라는 점인데 물론 이에 대한 것은 추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락] 17년 정미(407)에 [왕이] 교(敎)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어 … 군대와 … 합전하고 참살해 모두 소탕하였고,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군수물자와 병기는 수를 셀 수 없었다. [왕의 군대가] 돌아오면서 사구성(沙溝城)·누성(婁城)·▨주성(▨住城)·▨▨▨▨▨▨나(那)▨성(城)을 격파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영락] 20년 경술(410)에 동부여(東扶餘)는 옛날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아,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여성과 온 나라가 놀라 …. 왕의 은혜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비문」 
407년에는 탈자가 있어 누구와 전쟁을 벌였는지 알 수 없으나 백제로 보고 있으나 410년에는 동부여를 토벌한 내용으로 이 때에 64성 1천 4백촌을 공파했다고 합니다. 특히 비문에서는 백제를 백잔으로 칭하며 왜구를 유독 강조한 것에 이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 여러 이유 중 하나를 살필 수 있는데요. 무엇보다 선대왕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것을 만회하고 이제 고구려가 백제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있는 나라임을 후대에 전하고픈 고구려인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그러한 비문의 작성이 현대인들에게 논란이 될 줄 알았다면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작성했을까요. 아니면 비문의 내용이 단 하나의 거짓이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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