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황실과 인연을 맺은 고구려 여인
2023. 9. 12. 11:2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728x90
고구려 옆에 북위라는 나라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왕은 장수왕이었습니다. 고구려인 고조의 아버지는 고양으로 고조를 비롯한 4남 3녀를 고구려에서 낳았습니다. 그러던 고조는 아버지 고양을 모시고 식구들과 함게 470년경 북위로 넘어갔습니다. 고대국가시기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습니다. 따라서 고조 같은 고구려인이 북위로 이주해온다고 해서 딱히 막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조가 고구려에서 유력한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북위에서 고조에게 려위장군 벼슬을 준 것입니다. 같이 따라온 고승신도 명위장군 벼슬을 받았고 노비와 소, 마 등을 북위로부터 받았습니다.
고조가 북위조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그의 여동생이 북위의 왕 효문제와 결혼하여서 문소왕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소왕후는 아들 원각을 낳았습니다. 효문제가 고구려 여인과 결혼했던 이유는 그 여인이 미인이라서기보다는 고구려인이라는 신분이 작용했을 것으 로 보고 있습니다.
일례로 491년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임금 고조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는 베로 만든 옷을 입고 동쪽 교외로 나아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사신과 온갖 물품을 고구려로 보냈습니다. 또한 519년 문자왕이 사망했을 때도, 전(前) 임금인 세종의 부인이며 숙종의 어머니로 정권을 쥐고 있던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조문사절을 고구려로 보냈습니다. 508년에는 북위의 세종이 청주(淸州 산동성)에 고구려 시조의 제사를 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 당나라 고조가 애도식을 거행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사당까지 세우고 임금이 직접 애도식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입장에서 북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북위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나 친하고 있었던 것은 서로가 국력이 강한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북위에서 고조의 여동생을 왕후로 채택한 것은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고조용은 아버지 고양을 따라 북위로 건너왔습니다. 그 때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고양이 왔다고 합니다. 고조용은 궁녀가 되어 황궁에 들어갔고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문명태후 풍씨의 선택을 받아 13세의 나이에 효문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고조용은 효문제와 사이에서 2념 1녀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선무제와 광평왕 원회, 그리고 장락공주였습니다. 효문제는 북위의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고조용은 급군 공현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암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소왕후인 고조용은 죽은 뒤에 황후로 추존되었습니다.
또 고구려 여인으로 북위황실에서 출세한 사람으로 선무제의 황후가 된 고영이 있습니다. 즉 고영은 고구려출신의 최초 황후였습니다. 고영은 고조용의 남동생 고언의 딸이었습니다. 고영은 고모의 아들이자 사촌인 선무제의 후궁이 되었고 아들과 딸을 한명씩 낳았습니다. 본래 황후 우씨가 있었으니 우씨가 죽고 나서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구려인 문소왕후의 배출은 고조가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99년 효문제가 죽고 문소 왕후가 낳은 원각이 북위 7대 왕인 선무제가 되었습니다. 선무제는 이제껏 만나지 못한 외삼촌 고조와 고현을 궁궐로 불렀습니다. 선무제는 자신을 도울 세력으로 외가 고구려인들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선무제는 고조에게 평원군공, 고현에게는 징성군공이란 벼슬을 주었으니 고조는 권세는 수직상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선무제가 밀어주어 고조는 상서좌복야라는 더 높은 벼슬을 받았고 동생 고현은 고구려대중정이란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는 고구려 출신의 인재들을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가도록 하는 자리로 당시 북위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는지라 이들을 조정에 추천하였고 고조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선무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무제가 왕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 밑에서 권력싸움이 치열했습니다. 함양왕 희, 북해왕 상, 고양왕 옹, 팽성왕 사, 그리고 고조가 가세하였습니다. 이 중 함얌왕 희는 선무제를 제치고 북위 왕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514년 선무제의 명을 받아 남쪽을 공략하던 고조는 급작스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또 다른 변란의 예고였습니다. 고조는 선무제의 시신을 보고자 궁궐로 들어갔고 선무제 앞에서 절하는 의식을 하며 슬픔에 젖어있는 그때에 숨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고양왕 등은 고조가 나쁜 짓을 많이 했기에 죽였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다른 고구려 사람들에 대해서는 죄를 추궁하지 않았고 그저 벼슬을 낮추기만 했습니다. 북위의 고구려인들을 죽일 경우 고구려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19년 문자명왕이 죽었을 때 북위의 영태후가 동족 사당에 나아가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을 차린 것은 고구려를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고구려인으로 북위에서 출세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조의 아들인 고식은 청주자사 등의 벼슬을 지냈는데 그의 아버지가 시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인 가운데 고잠은 북위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고숭은 낙양령의 벼슬을 받고 정치를 잘해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무제가 죽고 나서 효명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함에 따라 그 생모인 호씨가 수렴첨정하게 되었습니다. 호씨는 고영에게 황태후의 칭호를 썼지만 곧 절에 유폐시키고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영의 장례는 황태후가 아닌 비구니의 예로 치루어졌다고 하며 고모 고조용과는 달리 시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고조용은 왜 암살당했을까. 당시 ‘자귀모사’라는 관행이 있었고 고조용은 그 희생자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황후나 후궁의 아들이 태자로 낙점되면, 훗날 황제의 친어머니가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미리 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고조용이 죽은 해는 496년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효문제가 양자강 유역의 남제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낙양을 옮긴 때입니다. 이즈음 효문제는 체제정비를 위한 조치를 연이어 발표합니다. 그 중 유목민들의 관습을 벌이고 한족을 문화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조처에는 반발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본래 태자이던 원순이 낙양을 탈출하여 옛 수도인 평성으로 도망가다가 붙잡혀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원순은 뚱뚱하고 땀을 많이 흘렸는데 이로 인해 낙양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고 탈출할 적에 그는 호복과 변발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러한 모양새가 효문제의 분노를 샀다는 것입니다. 원순이 죽게 되자 태자의 자리는 원각에게 돌아가게 되고 고조용이 희생되었다는 것인데요. 그러나 효문제는 이러한 관습을 따르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정작 중국역대왕조에서 그 사례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북위는 황제를 길러준 유모나 보모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마 풍소의란 여인이 고조용을 제거하여 훗날 보태후나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통한 실권을 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풍소의는 혼외정사를 일으켜 폐위당했습니다. 고조의 조카 고영도 황후였습니다. 선무제의 아들 효명제가 즉위하면 고씨 가문의 권력을 더욱 커질 것입니다. 고영은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자귀모사관행에 따라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후궁들도 아들을 낳지 않은 상황에서 선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실제로 고영 측은 선무제의 호씨를 살해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친위대 부사령관인 우충은 고조의 정적이므로 그 병력으로 고조를 살해하고 호씨를 살려두었습니다. 그리고 효명제가 즉위하자 호씨는 북위 역사상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는 장면을 보는 첫 번째 친어머니가 되었으며 태후의 자리에 올라 고씨가문을 몰락시켰고 그 과정에서 고영도 요광사를 절로 쫓겨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 것입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사신에게 뺨맞은 고구려 양원왕 (1) | 2023.09.14 |
---|---|
안장왕과 한씨 미녀 (0) | 2023.09.13 |
장수왕은 왜 평양성으로 천도했을까 (0) | 2023.09.11 |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정복활동 (0) | 2023.09.11 |
북연황제가 된 고구려후손 고운 (1) | 2023.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