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장왕과 한씨 미녀
2023. 9. 13. 11: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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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춘향전」은 배경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고대국가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의 안장왕과 한씨미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서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11년(529)〕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와 오곡(五谷)에서 싸워 이겨,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안장왕-
이 이야기는 백제본기에도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 혈성(穴城)을 쳐들어와서 빼앗았다. 〔왕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 잡지(雜志) 지리(地里)편에 보면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에 대한 설명 중에 다시 안장왕 이야기가 아주 짧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왕봉현은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인(漢人·氏) 미녀(美女)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방이므로 ‘왕봉(王逢)’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을성현은 한씨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봉현과 달을성현의 지명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안장왕과 한씨미녀가 역사적 사실임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장왕과 한씨미녀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상잡록』에도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상잡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통하여 『해상잡록』을 인용하여 안장왕과 한씨미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안장왕은 태자시절 상인의 옷차림을 하고 백제의 땅인 개백 그러니까 지금의 행주산성 부근에 갔습니다. 그곳에 한씨가 살고 있었는데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백제군의 감시를 뚫고 개백현에 들어온 흥안 태자는 한주 낭자를 보았습니다. 당시 한주 낭자의 아버지는 상인 출신의 부호였을 것입니다. 상인차림을 한 흥안 태자는 한주와 남모르게 정을 통했습니다. 부부의 약속까지 맺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몰래 자신의 신분을 태자라고 밝힌 뒤 귀국하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왕인 문자명왕이 죽자 흥안이 왕위에 올라 안장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러 번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습니다. 한편 개백의 태수는 한씨 미녀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청혼하였지만 한씨 미녀는 이미 정을 주고 멀리 갔으니 생사라도 안 뒤에 답변을 주겠다고 하자 태수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묻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자 고구려 첩자하고 내통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태수는 한씨 미녀를 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돌리려 할 때에 한씨 미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죽어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야 있건 없건/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한씨 미녀는 이 시를 부르고 죽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태수는 단념하고 한씨 미녀를 죽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한씨 미녀가 옥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안장왕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을밀이라는 장수를 보내어 한씨미녀를 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을밀은 이 일에 나서면서 안장왕에게 청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니 그는 안학 공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한씨 미녀를 구해오겠다는 것입니다. 을밀은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떠났습니다. 그는 바닷길로 가고 안장왕 또한 육로로 오기로 했습니다. 을밀은 결사대 20명을 선발했습니다. 그리고 평복으로 위장한 다음 개백현으로 잠입시킵니다. 그리고 5000명의 수군을 지휘하며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백제의 개백현 태수는 생일을 맞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태수는 사람을 보내어 옥에 갇힌 한씨 미녀에게 태수는 자신의 생일이라며 한씨 미녀를 죽이기로 했으나 마음을 돌리면 살려주고 그것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씨 미녀는 태수가 자신의 뜻을 빼앗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자신이 죽는 날이요, 그렇지 않으면 태수가 죽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수는 화가 나서 당장 처형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때 을밀의 결사대 20명은 광대패로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연회장에 들어가서 칼을 빼어들고 생일축하객들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군사 10만이 개백현에 입성했으니 항복하라고 고하였습니다. 을밀의 군사 5000명이 성을 타넘고 들어가 백제 군사들을 일거에 제압했으며 한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안장왕은 육로로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며 각 성읍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개백현에 이르렀습니다. 안장왕은 한씨미녀를 만났고 그는 약속대로 친누이동생 안학공주를 을밀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방이므로 ‘왕봉(王逢)’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씨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왕봉(王熢)’의 봉 자와 ‘고봉(高烽)’ 봉 자가 모두 ‘봉화’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을밀은 한주를 구출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현재의 고양시 고봉산에 올라가 봉화를 밝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니다. 고양시 고봉산에 유래를 담은 것이 바로 안장왕과 한씨 미녀 이야기이며 왕봉현(고양시) 지역이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땅이므로 왕을 만난 땅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529년의 일로 『삼국사기』에도 오곡성에서 있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오곡성에서 있던 전투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안장왕과 한씨 미녀 이야기는 지리지에서만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마 편찬자는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에는 주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안장왕의 아버지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로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문자명왕은 북위로부터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며 책봉을 받았습니다. 문자명왕 3년 2월에는 부여의 왕과 처자들 이 항복해 왔습니다. 부여는 이전 서진 무제 때 조공하였고 285년에는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옥저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후 서진이 모용외를 물리쳐주어 의라가 부여로 돌아가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모용외는 부여를 끊임없이 괴롭히니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진의 황제가 속전을 주고 부여인들을 되돌려 보내고 매매를 금합니다. 이후 부여는 약화되었고 494년 고구려에 항복해 옵니다. 한편 494년에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살수의 언덕에 전투를 벌인 일이 있었는데 신라가 견아성으로 물러가니 동성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했습니다. 495년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신라군이 오는 일이 있었는데 고구려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났습니다.
한편 529년의 일로 보듯이 고구려 안장왕은 적극적인 남진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경계선은 아산만까지로 보는데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오늘의 경기도와 충남 북부, 충북 서부에 고구려현이 우리나라 역대 지리지에 남아있고 529년전까지 이 일대는 백제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고구려현의 출현은 529년 전투의 결과이며 538년에 백제 사비천도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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