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신에게 뺨맞은 고구려 양원왕
2023. 9. 14. 11:3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728x90
북위는 효문제 사후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영태후가 섭정하였습니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또한 태무제 때 선비족들이 한화정책에 불만을 가져 최호와 화북의 한족들을 대부분 숙청하였지만 효문제와 풍태후 그리고 영태후는 또 한화정책을 실시하였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들의 불만은 523년에 일어난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북위의 상황은 고구려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구려는 북위와 공무역을 해왔습니다. 476년 이후 그 규모를 2배로 늘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북위로부터 들어온 물자는 고구려왕에 의해 귀족들에게 하사되었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북위와의 공무역을 통해 취득한 물자를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해 왔습니다. 492년에서 499년 이 기간에 유목민 거란족 기병이 북위의 동북방면을 급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사람 60여 명을 잡아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거란족들은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 휘하로 들어온 자들로 이들은 고구려의 상비군은 아니었으나 본래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초원에 살게 하되 고구려의 전투에는 동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북위는 거란족에게 납치된 사람들을 돌려받기 위해 고구려왕에게 요청하였고 고구려왕도 이에 응했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 문자왕은 반환하는 조건을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북위와 조공무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60여 명을 납치한 사건으로 북위와 마찰을 겪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자왕 대에는 북위와 총 35번의 사신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523년 북위의 북방에서 유연을 방어하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북위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고구려는 거란 기병들을 시켜 영주지역의 호족 한상을 납치해 옵니다. 그러면서 하호인 500가구도 고구려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상에게 6관등 대사자의 관등을 주려고 했으며 그 자치권도 인정하려고 했습니다. 고구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영역을 확장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이주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점령하는 편이 확실한 방법일 수는 있으나 이는 보다 큰 위험이 따르는 법입니다. 528년에는 고구려는 거란기병에게 지시합니다. 영주 서족에 있는 안주로 출동하라는 것입니다. 안주자사와 도독의 직책을 맡고 있던 것은 강과라는 사람이었고 안주부성은 약탈을 하고자 하는 반란군에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거란기병이 나타나자 반란군은 그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거란기병들은 강과에세 고구려로 이주할 것을 권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고구려로 입국하였습니다. 고구려도 강과를 중심으로 해당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고구려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구려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환경과 물자를 제공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구려는 자신의 나라에 더 많은 주민들을 안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선비족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 서위라 불렀습니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이 재상이 되어 550년에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북제를 건국했습니다. 서위에서도 정권은 우문씨가 차지하여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이 556년에 공제를 폐위하고 다음 해 북주를 건국하니 이로써 동서 양위는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552년 북제의 황제 고양이 고구려로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는 박릉 출신의 최유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 왕은 17세의 양원왕이었습니다. 그는 양원왕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왕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쳤습니다. 일개 사신이 고구려왕을 치는 상황임에도 그 누구 하나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구려신하들이 숨을 죽이며 사죄합니다. 최유가 요구한 것은 과거 북위에서 넘어온 유민 5천호를 돌려달라는 것이었고 그 요구대로 응했습니다.
동위의 황제 고징이 2대였고 그의 동생 고양이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경쟁자로 지목되었으므로 고양은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바보인 척 살았습니다. 고양은 형이 암살되자 그 무리들을 처리하고 실권을 쥐었으며 550년에는 동위의 천자 효 정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문선제입니다. 고양은 최고의 군주로서 역량을 발휘해나갔습니다. 그는 한족(漢族)보다는 유목민 기질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전투가 날때면 자신이 직접 나서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550년에는 장남인 고은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려 했는데 이유는 그가 너무 중국인 같은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양은 자신이 선비족으로서 자부심이 투철했고 거칠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처럼 거친 성격의 소유자를 고구려로 사신으로 보냅니다. 그것은 북위 말 내란기에 고구려로 넘어간 사람들 5천 호를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양원왕은 북제의 사신이 너무 무서워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원왕은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것은 외가 쪽에 이용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만으로 그가 전 고구려왕들이 겪지 않던 수모를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양은 거란을 소탕하고는 그 군대를 물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531년의 일입니다. 양원왕의 아버지는 안원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3명의 왕비가 있었고 정비에게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으로부터 왕자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둘째 부인의 왕자가 왕위를 이어야 하지만 문제는 셋째 부인이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해에 고구려에서 대란이 일어나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545년) 12월 갑오 고려국에서 세군과 추군(안원왕의 외가)이 궁문에서 크게 싸워 3일간 전투를 벌였는데, 세군이 패했다. 세군 측의 자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무술에 고려의 곡향강상왕(양원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흠명기 6년」
‘이 해에 고구려에서 대란이 있었다. 무릇 죽은 자가 2천여 인이었다.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고구려에서 (546년) 병오에 중부인의 아들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안원왕) 나이가 8세이다. 고구려왕의 부인이 3명인데, 정부인은 아들이 없다. 중부인은 세자를 낳았는데, 그 외가를 추군이라 한다.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외가를 세군이라 한다. 고려왕의 병이 위독하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자기 쪽 부인의 아들을 세우려 해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서기』 「흠명기 7년」
당시 이 싸움은 궁문에서 3일간 싸웠습니다. 3일이라는 시간이 짧을 수 있지만 궁문이라는 장소를 생각하면 싸움은 백병전으로 3일간 진행되었을 것이며 그로 인한 2천여 명이란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중부인 측은 소부인 측에 대해 처절하게 응징을 가했을 것입니다. 그 가문을 비롯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여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처단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고구려왕실에 큰 부담은 주었을 것이며 막대한 손실을 입혔을 것입니다. 일례로 신라의 거칠부가 고구려에서 승려로 활동할 시절 그의 스승 혜량은 그에게 신라로의 귀순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이유는 고구려에서 대란이 일어나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또한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이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의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연가 7년은 539년 고구려 안원왕 시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적지 않은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이 불상을 들고 넘어온 것입니다.
이 대란은 고구려에게는 위기였고 백제는 다시 한 번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백제는 이 지역을 일시에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충주단양까지 주둔해 있던 상황으로 이들이 뒤를 친다면 상황은 알 수 없었습니다. 백제는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라를 끌어들입니다. 이 작전은 성공했으나 백제는 냉혹한 국제관계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힘을 합쳤던 신라가 통수를 친 것입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 영류왕은 왜 대당 화친정책을 썼을까 (0) | 2023.09.16 |
---|---|
고구려 전쟁의 힘 말은 어디서 왔을까 (1) | 2023.09.15 |
안장왕과 한씨 미녀 (0) | 2023.09.13 |
북위 황실과 인연을 맺은 고구려 여인 (0) | 2023.09.12 |
장수왕은 왜 평양성으로 천도했을까 (0) | 2023.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