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영류왕은 왜 대당 화친정책을 썼을까

2023. 9. 16. 11: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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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한국사에 있어 잊지 못할 고구려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바로 살수대첩입니다. 살수대첩하면 을지문덕을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수나라군대는 육로로만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113만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군 앞에서 고구려가 요하 일대에 주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정예병 30만으로 수도 평양성을 번개처럼 직공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수군(水軍)이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육로로 오는 군대는 을지문덕이 이끄는 부대가 막았다고 해도 만약 수군이 고구려 땅에 상륙하여 평양성을 진격하여 함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수군 역시 고구려땅에서 격파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막아낸 것이 바로 고건무였습니다. 고건무는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이었습니다. 612년 당시 영양왕은 바다로 오는 수군은 고건무로 하여금 막게 하였습니다. 수나라해군은 30만 수나라 별동대에게 지원하면서 고구려수도인 장안성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도 이러한 수나라의 작전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나라해군이 대동강하구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고건무는 당나라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고건무의 부대는 패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패한 것입니다. 몇 번의 싸움에서 고구려는 일부러 패하면서 달아났습니다. 당시 수나라 수군 사령관은 내호아였습니다. 그는 고구려가 패하는 것을 보고 자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장안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냉정한 주법상이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그는 별동대와 함께 힘을 합쳐 공격하자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내호아는 군대를 이끌고 장안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군이 쳐놓은 함정이었습니다. 고건무는 고구려군사들을 비어있는 절터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따로 군사들을 모아서 수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너무 승리에 취한 수나라 군대는 서서히 그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나라 군사는 절터까지 왔습니다. 그 때 고구려군대가 튀어나와 수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수나라 군대는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하고 적장 내호아는 겨우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내호아는 다시 대동강하구에서 군대를 정비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수나라 해군의 패배소식은 별동대에도 알려졌습니다. 크게 사기가 떨어진 수나라 군대는 회군하다가 살수에서 몰살당했습니다. 당시 수나라의 대전략은 내호아의 수군이 실어온 물자로 평양성에 전진하고 있는 별동대 30만명을 먹이고, 그 병력들로 평양성을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작전을 깨버린 고건무는 을지문덕과 함께 전쟁영웅이라 불릴만합니다. 하지만 이 때의 전쟁경험이 고건무에게는 무엇인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나라를 격퇴시킨 과거 전력과는 다르게 당나라에게는 화친정책을 펼쳤습니다. 

한편 고건무가 상대한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 자리에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당태종은 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아버지는 이연을 연금하고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혼란에 대해 돌궐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힐리가한이 10만기병을 이끌고 당나라 장안 부근까지 쳐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장안에 있던 장정 수는 수만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불리해진 당태종은 냉정하게 그들에게 화의를 요청하며 재물을 힐리가한에게 바쳤습니다. 동돌궐은 원하는 바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자세에 있던 당태종의 잠깐의 굴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627년 동돌궐 내부에서 돌리가한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일로 힐리가한이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당태종은 개입하지 않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확실하게 힐리가한의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 태종은 회흘과 설연타를 지원했는데 이들은 초원 서부의 돌궐세력으로 힐리가한과는 반대에 있던 세력으로 더불어 돌리가한도 지원했습니다. 629년 유목민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그 해말에 당태종이 이들에게 개입하였습니다. 그리고 힐리세력을 급습하여 사로잡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동돌궐이 당에 복속된 것입니다. 이 때 영류왕이 된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 당태종이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지도를 바쳤습니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정책을 펼치면서 당나라 고조(이연)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당 고조가 수나라 말기에 많은 중국인 포로가 고구려에 남겨졌다는 것에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영류왕은 고구려에 있는 화인(華人)들을 모두 찾아 돌려보냈습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1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당고조가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에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624년에 책력 반포를 요청한 것은 고구려가 제후국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당나라에서 형부상서 심숙안을 보내 왕을 책명으로 임명하여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왕이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이미 장수왕 이래 지속되어온 외교적 행위였습니다. 한편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서 중재하기도 했습니다. 영류왕 9년 신라와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조공을 못하게 하면서 침략을 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당 고조는 화친을 권고하였고 영류왕은 표문을 보내 백제, 신라와 화평하게 지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정책을 핀 것은 잘못이었는가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포로송환 문제가 영양왕이 먼저 당나라 고조에게 제안을 한 것이라면 그가 사대주의자라는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수나라 포로 송환은 당나라 고조가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이것에 응한다고 해서 과연 굴욕적인 것인지 아니면 당나라가 내민 우호의 제스처에 응한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럼 628년에 왜 봉역도를 바친 것일까. 이것은 고구려가 당나라에 신속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고구려 입장에서 여기까지 고구려 영토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류왕은 봉역도를 제시하여 고구려 영토가 여기까지이니 이와 관련하여 영토분쟁을 미리 막고자 함을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도 영류왕 대의 일입니다. 당시 당고조가 아닌 당태종시기였습니다.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봄 2월에 (영류)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1000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삼국사기』

그런데 당에 의한 경관 파괴는 631년 8월에 있었던 일로 고구려는 그보다 앞선 2월에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영류왕은 당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천리장성의 축조를 지시할 수 있습니다. 626년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왕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은 겉으로는 평화를 원하는 듯했지만, 내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세민은 고창국, 토번국, 돌궐국 등 주변의 나라들을 하나하나 굴복시켰으니 이러한 움직임은 고구려에게도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641년 영류왕 24년에 고구려 태자가 당나라에 입조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당에서는 보답으로 진대덕을 사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진대덕은 고구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당나라는 이 때 이미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당나라가 고창을 복속시킨 일이 있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이 좋았다고 합니다. 한편 고구려왕이 죽자 당나라 황제가 애도했다고 합니다. 영류왕 25년 10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것입니다. 당 태종은 이에 슬퍼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본래 한이 설치한 사군(四郡)의 땅’이라 했던 그에게 고구려 정벌의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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