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하다
2023. 9. 17. 11:3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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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고구려의 실권은 그의 세 아들에게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연개소문 대에 고구려의 문제점은 부각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중앙의 모든 요직과 지방 성주의 자리를 자신의 사람들로 채운 것입니다. 고구려 5부귀족도 역시 연개소문의 지시를 따라야 했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바로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시성공략에 실패한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에 대해 인정하였고 연개소문을 강력한 실권을 쥐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의 세 아들들 즉, 연남생과 연남건, 남산에게 이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각각 세 아들들에게는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실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너희 형제들은 어수와 같이 화목하여 벼슬을 다투지 마라’ 『일본서기』
적어도 연개소문을 형제들간의 불화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의 첫째 연남생은 642년에는 선인(先人) 벼슬을 얻었는데 그때 연남생의 나이는 9세였습니다. 15세에는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봉해졌으며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23세에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임명되었고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으며 28세에는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 兼 三軍大將軍)이 되었습니다. 이 정도의 초고속승진은 정상적인 것인 아닌 것으로 연개소문의 아들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661년 연남생은 막리지에 있었고 삼군대장군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연남생은 계필하력의 군대를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연남생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지켜 계필하력의 군대가 오랫동안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되어 강이 얼어붙으면서 당군이 기습공격해서 연남생은 크게 패했습니다. 여기서 고구려군은 3만명이나 전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당나라군은 회군했다고 합니다. 당시 당나라군은 연남생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패배시켰으나 워낙 손실이 커서 회군하였다거나 사실 패배한 사실이 있음에도 감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글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철군하는 바람에 정명진과 양사선은 물론 정명진이 이끄는 루방도행군이 결국 궤멸당하고 평양성을 공략중인 당군과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못해 결국 당군이 사수에서 대패를 당하였으니 아마 당나라는 연남생과의 전투에서 사실상 많은 피해를 보고 패배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남생이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실권자가 되자 아무래도 그의 카리스마보다는 아버지가 연개소문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면 그를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는 나라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 665년 지방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장안성의 업무는 자연스레 둘째인 연남건과 셋째 남산에게 맡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연남생의 부하가 두 동생이 남생이 장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고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동생들에게 그 부하들이 있어 그들은 동생들에게 남생이 동생들을 제거하려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남생이 지방으로 간 것은 민심을 얻어 지지세력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생이 평양을 북쪽 여러 곳을 돌고 있으니 이때가 기회라고 하였습니다. 연남건과 연남산 두 형제가 믿지 않자 반대파들은 더욱 심한 모함을 해댔고 동생들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때 즈음 연남생은 국내성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하가 고하길 지방을 돌아보시는 틈을 타서 연남건과 연남산이 태막리지를 해치고 그 자리를 빼앗을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연남생도 이 이야기를 처음에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남생은 심복부하를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러데 심복부하가 동생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연남건과 연남산은 이 사람에 대해 연남생이 보낸 첩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며칠 후 궁궐로 돌아오라는 보장왕의 명령이 내려졌으나 연남생은 이대로 행동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에도 돌아오지 않자 동생들은 연남생이 동생들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가 드러났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연남건은 스스로 태막리지가 되었고 모든 권력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연남생을 잡아들이라고 하면서 그의 아들 헌충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연남생은 분노가 차올라 국내성을 장악하고는 대항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세는 연남생에게 불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당나라에 구원하기로 합니다. 군사를 요동으로 돌려 당나라와 가까운 현도성에 머물면서 대형 염유를 다시 당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당나라는 이에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연남생은 아들 연헌성을 보내 고구려를 친다면 자신이 돕겠다고 하엿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연남생은 국내성 이하 6개성 10만호를 자신의 세력 아래에 두었고 목저성 등 부여 방면의 3개성도 그의 편이었습니다. 아마 연남생이 당나라로 귀순하면서 이들도 동참했다면 아마 엄청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연남생은 아마 고구려에 대한 기밀정보도 넘겼을 것입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수대의 대외전문가 장손성과 배구도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남생의 투항이 고구려의 방어력을 저하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을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정벌할 때에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요동성의 보급기지는 당군에게 분배되었고 이는 당군이 행군 시에 많은 식량을 지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667년 당나라군대가 어렵지 않게 신성을 점령했습니다. 신성의 성민인 사부구와 그의 부하들이 성주를 결박하고는 성문을 열은 것입니다. 문제는 신성이 전략적인 요충지였다는 점입니다. 이 성을 시작으로 16개의 성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한편 고구려군도 반격했습니다. 연남건이 말갈기병을 이끌고 신성으로 왔으나 그의 의도대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신성이 머물고 있던 고간의 병사들은 나와 요령성 조양 서북의 요하의 북안에 있는 금산이란 곳을 지나갈 때에는 고구려 휘하의 말갈기병의 습격을 받아 후퇴하였습니다. 이 때 설인귀가 이끄는 유목기병이 와서 고구려 말갈 기병을 쳤습니다. 이에 고간도 뒤를 돌아서 고구려 말갈기병을 공격했습니다. 이에 고구려군 5만 여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구려 말갈기병들은 남소성, 창암성, 목저성 등에 배치되었던 병력이라 이 성도 쉽게 당군에 넘어갔습니다. 이후 당의 이세적부대가 부여성을 함락시켰고 부여주에 있던 40여 성이 당에 투항했습니다. 연남건은 부여성을 회복하기 위해 5만의 군사를 동원했으나 설하수에서 이적의 당군과 싸우다 패하였습니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북방의 유목민들은 군사로 동원하는 데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유목민 기병들이 당나라군대에 동원되었습니다. 당은 668년 7월과 8월 사이에 이세적의 당군과 계필하력의 유목민 기병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군은 평양성을 포위하였습니다. 668년 6월 21일 문무왕은 20만의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7월 22일에는 서울과 황해도지역의 고구려성들이 신라에 항복했습니다. 7월 16일에 문무왕은 한성에서 신라군에게 평양으로 출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양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연개소문에 의해 세워져 두려움에 떨며 왕위를 유지한 보장왕이었으나 보장왕에게 연개소문을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평양성이 포위된 마당에 그는 당나라에 투항을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차남 연남건은 계속 저항하였습니다. 종종 성문을 열고 나와 역습을 시도했으나 돌궐기병들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다 남건의 측근으로 신성이란 자가 당과 내통하여 성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포위 한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연남건은 당나라에 잡혀가 먼 검주 땅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연남생은 연남건과 달리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공적으로 우위대장군 번국공이란 높은 벼슬도 받았고 식읍 3천 호도 받았고 연남산도 역시 당에서 벼슬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679년 46세의 나이에 연남생은 병들어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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