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쟁의 힘 말은 어디서 왔을까

2023. 9. 15. 11:3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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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공주는 궁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살림을 장만했고, 바보 온달을 잘 가르칩니다. 또 병든 국마(國馬)를 사오게 한 뒤 튼튼하게 길렀습니다. 온달은 이렇게 공주를 통하여 실력을 길렀고 사냥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내 왕을 놀라게 하였는데요. 공주가 국마를 골라 사오라고 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나라에서 직접 말을 생산하고 관리해왔다는 것입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순한 인물로 사기가 있습니다. 사기는 치양 전투 당시 기록으로 등장하는데, 본래 왕의 말을 돌보던 일을 하다가 말굽을 상하게 해서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치양 전투가 벌어지자 백제로 귀순해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에게 고구려군의 기밀을 알려줘서 백제군이 승리하게 도와준 것입니다. 그리고 사기가 백제로 넘어오면서 여러 정보를 가져왔을 것이며 따라서 백제에서도 말을 직접 키웠을 것입니다. 고대국가에서 말은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을 상하게 했다면 처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국(國)’은 수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국마는 나라의 말일 것입니다.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시오.’ 
온달은 공주가 시키는 대로 병든 말을 구입합니다. 그리고 공주가 정성을 다하여 길러 말을 건강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 시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말이 거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 도독부에 상비된 말은 그 수가 매우 많았다. 개원25년 (737) 칙을 내려 ’천하가 무사한데도 (상비의 마필이 많아) 노고와 비용이 자못 번다하니 마땅히 경성과 동도에 가까운 지역에 편의에 따라 3천 필을 남겨 천자의 행차 및 가사의 승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일체 중지하라‘고 하였다.’
말은 사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해야 합니다. 만약에 평화로울 때면 이러한 말들을 대량 사육하는 일은 버거운 일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있는 말은 처분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의 수를 통제하여 국가경제를 유지하여 국가는 질 좋은 말을 유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온달은 시장에 가서 낙인이 찍힌 말을 골랐습니다. 그러한 말들이 국마이기 때문입니다. ‘관’자가 말의 오른발에 찍혔습니다. 그리고 말의 나이를 밝혀놓기 위해 출생년도와 관리목장의 이름이 낙인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말의 엉덩이나 허벅지에 낙인을 찍어 나라의 것임을 표시했습니다. 이것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평강공주는 병든 말을 사오라고 했을까. 아마 이 병든 말은 나라에서 처음부터 병들어있던 말을 키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에서 키우는 말은 엄격한 기준 아래 선별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에서 건강한 말을 시장으로 내보냈다면 그것은 나라에서 키우기에 미달이 된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병든 말은 나라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했으나 어쩔 수 없이 병이 들어 시장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훈련을 통해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말을 길들인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온달을 나라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내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말을 얻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훈련된 말이어야 합니다. 애초부터 훈련이 되지 않은 말, 즉 국마가 아닌 것은 처음부터 길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비용이 드는 일입니다. 하지만 국마로서 합격했으나 병이 들고 나라에서 대량으로 말을 사육하는 탓에 제대로 관리 받지 못할 말들이 시장에 나왔다면 차라리 이것을 사서 잘 키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건강해져서 예전의 기량을 회복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강공주는 어떻게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야기라 꾸며낸 것일 수 있지만 고구려여인들이 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말과 친숙한 환경에서 지냈을 지도 모릅니다. 
‘그 후 돌궐의 핍박을 받자 (거란) 1만 가가 고구려에 기탁했다.’ 『수서』
고대국가 시기에 인구가 국력이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들입니다. 거란들이 돌궐로부터 위협을 받자 고구려에 유입되었습니다. 거란인이 유입되며 그와 함께 따라온 가축수는 5-10배에 달할 것입니다. 문자명왕 시기에 고구려 영토 안에 살던 거란인들이 북위의 사람들을 납치해오는 일이 있었는데 문자명왕은 거란인들이 잡아온 북위 사람들을 다시 송환해 줍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거란인들의 반발이 없었다면 당시 고구려는 거란인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고구려는 말을 사육하도록 지시를 내렸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교역을 통하여 말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자는 당연 유목민이었는데요. 고구려는 유목민들에게 곡물과 철, 생필품을 주고 말을 포함한 가축을 받았습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6세기 말에 이미 중국 요서 지방의 유성에 고구려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수나라가 거란을 공격할 때 몰래 거란에 잠입하기 위해 잘 훈련된 정예군사 2만 명을 뽑아 장사꾼처럼 옷을 입힌 뒤 고구려의 시장이었던 유성을 통해 거란까지 몰래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수치의 정확성은 떨어지더라도 고구려 유성 시장은 그토록 많은 장사꾼이 돌아다녀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멀리 서역 국가에까지 교역을 하고 외교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는 이미 고대의 국제 무역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 유성이란 곳에서 교역을 통해 말을 얻었을 것을 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고구려의 국영목장이 사막과 인접한 북서쪽에 있다면 아마 그 근처에서 교역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얻은 말을 고구려 내지까지 들여오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말들이 오는 과정에서 피로를 느꼈을 것이며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다른 고구려로 온다면 말들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되도록 말들이 원래 살았던 곳과 비슷한 장소에 목장을 지어 교역으로 얻은 말들을 사육했을 것입니다. 

『송서(宋書)』에는 “(439년) 태조가 북위를 토벌하고자 고연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를 내리자, 80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연은 장수왕입니다. 당시 말은 중요한 전략물자였습니다. 특히 유목민족(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기마병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송나라는 말이 없으면 북위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말은 대부분 북위가 점령한 초원 지대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쪽에 있던 송나라로서는 고구려에 요청합니다. 고구려는 소중한 전략물자를 공짜로 넘겼을까요. 당연히 고구려 입장에선 송과 백제가 밀착하지 않도록 요구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송이 어느 정도 북위를 견제해줘야 그 옆에 있는 고구려가 편했습니다. 그런데 송 입장에서 말을 구할 곳이 고구려 밖에 없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곳에도 말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말이 우수하다거나 아니면 송나라와 비교적 기후가 비슷한 환경이 고구려여서 고구려산 말을 선호했을 수 있으나 근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의 말을 품질이 좋았다고 하면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말을 잘 다루었고 그리하여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말을 잘 길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년(645)〕 〔고〕연수와 〔고〕혜진이 군사 3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청하니, 황제가 욕살 이하 군관 3,500명을 뽑아서 내지(內地)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말갈의 군사 3,300명은 잡아다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획득한 말이 50,000필, 소가 50,000두, 명광개(明光鎧)가 10,000벌이었고 다른 기물도 그와 같은 수량이었다.’ 『삼국사기』  
 당은 이 때 승리하여 고구려로부터 상당한 말을 획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필요한 말을 일반 백성들로부터 다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유목민들로부터 말을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고구려입장에서 유목민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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