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왜 망했을까
2023. 9. 18. 11:3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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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연개소문의 세 아들을 분열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개소문 역시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가 세 아들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끝부분에 나오는 사론에서는 고구려의 멸망원인에 대하여 중국에 대해 두려움을 잃었으며 인심을 잃었다는 데에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당나라와 화친을 하였더라면 멸망이이라는 비극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심을 잃었다는 것은 연개소문이 최고실권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며 불의를 행하고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만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고구려는 멸망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상대했던 나라 수나라와 당나라는 국력에 있어 고구려에 크게 앞선 나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침략전쟁을 벌일 경우 고구려가 실패하는 것에 따른 부담이 컸고 고-수당전쟁을 통해 여러 차례 방어전을 치른 고구려는 승전을 하면서도 조금씩 국력을 갉아 먹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백제가 멸망하지 않도록 도와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고구려는 육로에서 당나라와 교전 내지는 전쟁 준비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백제를 구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상당한 병력을 백제에 투입하기에는 중국왕조와의 대결도 무시 못했을 것입니다. 신라 입장도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라의 주적은 백제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정벌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신라는 백제를 정벌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백제와의 대결에서 나라 존립이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항상 위협받아왔습니다. 북으로는 유목민과 중국왕조를 상대해야 했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고구려가 남방에 우군이 없던 시절, 돌궐과 싸우는 도중에 한강 유역을 상실했고, 수나라와 싸우는 도중에 신라에게 500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백제와도 교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백제와 동맹을 맺기 전까지 백제와 신라는 중국왕조에 고구려에 쳐달라는 요구를 계속 들어왔습니다.
'고구려도 30만의 강병(强兵)으로 당에 맞서다가 패배하였는데 발해의 군사력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므로 승산이 없습니다.’
이 말은 훗날 발해의 무왕이 당나라를 침공하려고 할 때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만류하며 한 말입니다. 그러면 이 30만이라는 숫자는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일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하면 전장에 동원될 수 있는 정규상비군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전근대 국가 중에 30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는 고구려와 고려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고려보다 앞선 나라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상당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강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백제가 弓 箭 矛 刀 4가지의 무기를 사용할 때 고구려는 활, 창, 폴암, 검 종류에서만 최소 8가지를 (弩 弓 箭 戟 削 矛 鋋 刀 劍 貊弓 貊劍) 운용했습니다. 문제는 상대가 당나라였고 당나라가 주변국 즉, 서돌궐, 위구르, 거란, 해 등을 제압했으며 남쪽의 백제마저 멸망시켰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멸망당시 당나라에는 이세민, 이세적, 장손무기, 아사나사이, 이도종, 이세적, 설인귀, 소정방, 학처준, 정명진, 계필하력이 1급 장수였고 연수, 고혜진, 뇌음신, 생해, 연남생, 연남건이 고구려의 장군진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당대 장수들에 비해 밀리지는 않더라도 승리를 가져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당나라는 주변세력들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상대할 동안 온전히 여기에만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물자보급에 있어서도 당나라는 고구려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수,당나라와 상대하면서 후방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객관적인 전력이 당나라에 비해 열세였던 상황에 그마저도 분산해야 했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의문이 따릅니다. 수나라나 당나라에 왜 그렇게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일에 집중했는가입니다. 수나라는 전쟁의 여파로 고구려보다 먼저 멸망했고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대결에 집중하는 동안에 토번이 실크로드를 잠식하고 말았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일전을 끝내놓고 다시 토번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반도의 병력은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정책의 최고 수혜자는 신라가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여러모로 악재가 계속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 내주어야 했고 고문간이 지휘하는 고구려 유민들이 협력한 돌궐 제2제국의 부흥도 막을 수 없었고 698년에는 발해가 건국되었습니다.
수나라는 북주를 계승하였습니다. 이 북주는 577년 북제를 병합하였으며 이로써 북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고구려는 북주의 통치를 반기지 않는 북제인들의 반감을 부추겼습니다. 삼국사기에는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수나라는 고구려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똑같은 해에 수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수양제는 계민가한의 돌궐기병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려했지만 침공계획을 의논하려 한 계민가한이 609년 낙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아들 시필이 가한으로 즉위했는데 고구려는 그를 선동하여 수나라에 적의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고구려 사신은 초원에서 왕위계승이 있을 때마다 나타났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통일하자 이를 압박하기 위해 꾸준히 외교방법을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나라가 엄청난 보급을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하는 싸움이 벌어졌고 살수에서 대패를 당합니다. 하지만 630년 돌궐이 스스로 붕괴하면서 당에 복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대신하여 설연타가 들어섰고 이들이 고구려와 연합할 경우 당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서쪽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태종은 자신의 딸을 토번으로 시집보냈으며 토번으로 문물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645년 당태종이 안시성 싸움을 벌일 당시 설연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당의 수도와 인접한 오르도스지역을 침공합니다. 고구려는 설연타에게 거금의 공작금을 보낸 바 있었습니다. 결국 스트레스를 얻은 당태종은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였습니다. 661년에도 고구려는 몽골고원에 있는 철륵에게 공작을 보냈습니다. 당시 소정방의 보병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661년 철륵의 여러 부족들이 당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당고종은 계필하력의 유목기병들을 서북으로 돌리라고 하였고 이로 인해 평양성 앞에는 당의 보병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회군하다가 대패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거란이나 말갈인들에게 물자를 대주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곡물도 지급하였고 그러면서 고구려의 전쟁에 거란이나 말갈인들을 동원시켰습니다. 하지만 유목민들으 고구려왕의 말만을 좇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국을 통일한 수당은 고구려가 거란, 말갈을 휘하에 두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수당의 지속적인 구애로 유목세력 중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 이탈하기도 했습니다. 수당은 고구려와 유목민들과의 관계를 약화시켰고 더 나아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이들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당은 630년 동돌궐을, 646년에는 설연타를, 657년에는 소돌궐을, 61년에는 철륵을 복속시켰습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세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거란과 말갈인들의 이탈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탈한 유목민들이 당나라에 붙어 힘이 되었고 이것이 고구려의 멸망을 부추겼습니다. 당나라의 이런 행보를 본다면 과연 고구려 멸망의 원인은 그 내부에만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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