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군사력이 강했다면 그 이유는
2023. 9. 20. 11:4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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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군사력에 강했다는 사실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구려가 초기부터 강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은 중국의 왕조들에게 부담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인데요. 어쩌면 최고로 강한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약 무시할만한 국가도 아니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고구려가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와 맞닿아 있었고 서북방면으로는 한족이 세운 중국왕조 내지는 유목민이 세운 왕조와 군사적으로 대결을 펼쳐야 했습니다. 그 많은 정벌과 외침 속에서 고구려는 700년 가까이 존속한 나라였는데요. 고구려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강했던 나라인지 아니면 중국왕조에게 조공을 바치고 연명했던 나약한 왕조였는지는 그 판단의 개인의 몫이지만 적어도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나라가 7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후한서』 ‘동이열전-고구려전’
이 자료는 고구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것이지만 고구려인들이 특별히 싸움을 좋아했다기보다는 환경상 그렇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물론 유리왕, 대무신왕, 모본왕, 태조왕 등 초기 왕들은 모두 정복군주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들은 정복군주를 목표로 했는지 의문입니다. 고구려는 환경이 척박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병합하거나 복속시킴으로써 해당지역에서 물자를 충당하는 식으로 나라의 규모를 키워갔을 것입니다. 그러한 초기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정복군주로 표현될 수 있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 부정적이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중국왕조들은 수없이 고구려와 부딪혔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전투적인 모습을 부정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구려에 중국인의 눈에는 앉아서 먹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 이처럼 앉아서 먹는자(좌식자坐食者)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곡식·소금·생선을 운반해 그들에게 바친다.’ 『삼국지』 ‘위서동이전-고구려조’
당시 고구려인구가 3만호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1만이 좌식자였습니다. 이 1만 여명이 앉아서 먹기만 하고 농사를 짓는 하호들이 양식을 갖다 바쳤다면 고구려는 그 전에 망했을 것입니다. 좌식자들은 고구려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으면서 외적이 침략하면 나아가 목숨을 바쳐 고구려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였습니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는데, 그 이름을 부경이라 한다.’
이 부경은 1만 여명에 달하는 전사 집단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척박한 산지에 자리 잡은 고구려에서 전쟁과 약탈은 고구려에게 나라를 지탱하게 하는 산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좌식자들은 평소에도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하니 이들의 역할은 전사였습니다.
하지만 전사집단은 항상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의 일원적인 군사체계 속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정점에 국왕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자신이 속한 나부를 위한 집단이었는데 이들 나부가 국왕이 소속되어있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고 고구려의 군사조직은 게루부 왕실에 속한 국왕직속부대와 각 나부에 속한 군사였던 것입니다. 이는 국왕이 국가 내 모든 무장 세력을 자신의 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으로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초기에는 군사들은 나부에도 속해 있었으므로 고국원왕 대에 백제에게 패한 것도 이러한 것에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국원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을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이런 묘사가 덜하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중에 소수림왕 때 국가적 율령 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대왕 때 왕당(王幢)과 관군(官軍)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 통제하의 지휘 체계와 병력 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생각하면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사병집단들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 대에 강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것과 관련 있습니다. 각 부족이 관할하던 전사집단을 하나로 통합한 것입니다. 일원화와 이원화의 차이는 바로 전투력인데요. 6대 태조왕 시기 관나부의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국을 쳐 그 왕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패했다면 관나부의 세력약화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두려워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는다면 이는 전투력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광개토대왕 대에는 이들을 다 통합하였고 왕당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한 왜인이 신라를 침략했을 때 5만의 군사를 보냈는데 아마 이 병력은 일부였을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최소한 5만의 왕당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병력을 토대로 영토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습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보잘것없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거리마다 큰 집을 짓고 이를 경당(扃堂)이라고 부르는데, 아직 혼인하지 않은 자제는 이곳에서 밤낮으로 독서하고 활쏘기를 익힌다.’ 『구당서』권199상, 「열전」149상 동이열전 고려
‘(고구려의)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하여 마을 궁벽한 곳의 보잘것없는 집에 이르기까지 또한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서 거리 모서리마다 큰 집을 짓고 경당(局堂)이라고 부르는데, 자제로 미혼(未婚)인 자를 무리 지어 살도록 하고, 경전을 읽으며 활쏘기를 연습한다.’ 『신당서』권220, 「열전」145 동이열전 고려전
고구려는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을 두었고 유학을 가르쳐 충효를 학습시키고 그와 함께 활쏘기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소수림왕 대에 수용한 불교가 군사력 통합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율령반포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니 이것도 군사력 증대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강한 군사력에는 전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요. 고구려의 주요 전술 중 하나가 바로 청야전술입니다. 또한 여기에 고구려는 강력한 산성을 쌓아 적들을 상대했으며 여기에 겨울이 되어 혹한이 찾아오면 적군은 작전을 수행하기 까다로웠습니다. 상대군은 고구려의 청야전술로 보급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견고한 고구려산성, 그리고 추운 날씨를 견뎌내야 하므로 이는 적들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산성을 떠올리지만 수군도 삼국 중 최강이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광개토왕 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년), 백제의 북방 해양거점이었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해 한강 하구와 경기만의 백제 함대를 무력화시켰으며, 396년까지 인천, 한강 수로 그리고 남양 반도에 이르는 오늘날의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58개 성을 점령해 한반도 서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차지했을 때도 수군을 동원합니다. 이러한 수군은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군대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한편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추모왕이 천제(天帝)와 하백(河伯)의 혈통을 이어 고구려를 세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러한 추모왕의 혈통을 이어받아 황천(皇天)과 사해(四海)까지 광개토왕의 은택과 무위가 미쳤다고 서술하는데요. 여기서 사해가 주목되는데, 사해란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를 의미합니다. 고구려의 왕은 천손(天孫)으로 세계의 지배자였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고구려 정복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영토확장을 해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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