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고구려와 고구려 현은 무슨 관계인가

2023. 9. 23. 07:5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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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전한서』 「지리지」 ‘원도군’에서는 한무제 원봉 4년(기원전 107년)에 이 군을 한무제 원봉 4년에 개설되었다고 하며 4만 5006가호에 인구가 22만 1845명이고 소속된 현이 세 현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고구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도는 현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한서』 「지리지」에서는 원도라고 하고 있지만 한나라에 만든 『사기』를 비롯, 지리지를 제외한 『전한서』에서도 현도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기』에는 원봉 3년 그러니까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현도입니다. 또한 『사기』나 『전한서』에서는 원봉 3년에 그 땅을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으로 삼았다고 하니 현도군이 만들어진 것은 원봉 3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서』
매우 간략하지만 한 무제 시기에도 이미 고구려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구려라는 명칭은 중국의 고서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후한서』의 군국지에서는 ‘고구려성’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의 현도군에는 고구려현과 고구려성이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라는 지명은 이전부터 있어왔고 현도군이 설치되면서 고구려 현이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기원전 37년보다 70여 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있던 것입니다. 
‘동명이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으며, 그 뒤 갈래가 나뉘어 고구려 부족이 되었다. 그 나라는 한의 현도군이다. 한의 무제 원봉 4년에는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두었는데 ,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소속되게 하였다.’ 『양서』 「열전」 -동이 고구려전-
『양서』에서는 고구려전을 설명하면서 동명왕을 고구려의 건국자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갈래가 나뉘어져 고구려 부족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4군을 설치하면서 현도군에 하나의 현으로 소속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한의 현도군이었고 고구려현이 곧 고구려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서』에서는 고구려현을 곧 고구려국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이보다 앞선 기록서인 『전한서』는 고구려를 하나의 국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 때의 고구려현은 어디까지만 현일 뿐, 고구려국과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후한서』나 『양서』에서는 현도군을 설치하고 다음에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도군이 설치되어 현으로 삼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습니다. 다만 『후한서』는 고구려현을 고구려국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양서』는 고구려현이 고구려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고려는 본디 고구려라고 한다. 우임금이 9주로 나누었을 대 기주 땅에 속하였고 주나라가 기자의 나라로 삼았으며,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이었다. 요동에 위치하고 부여에서 나뉜 갈래였으며 평양을 도읍으로 하였다.’ 『송사』 「열전」 외국전 고려
 『송사』에서는 고구려를 한나라 때 현도군이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양서』의 서술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양서』는 중국 남조 양나라 시기의 역사서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북위라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에서는 『위서』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에 대해 ‘주몽이 나라를 세워 이름을 고구려라 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양서』에서는 ‘고구려가 한의 현도군이었다.’고 하거나 ‘현도군을 두어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소속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후한서』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양서』를 제외한 다른 중국의 사서들에서는 고구려현이 곧 고구려국이라는 식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한나라의 원제의 건소 2년 갑신에 마한의 왕검성에 나라를 열었네.’ 『제왕운기』
그러면서 주석을 달았는데 ‘지금 서경이다. 고구려는 현의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양서』의 기술과 통하는 것으로 고구려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가진 현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기록에서도 『제왕운기』를 제외하면 고구려란 나라를 고구려현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사서는 없습니다. 
‘유리왕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의 양맥을 치게 하여 그 나라를 멸하였으며 군사를 더 나아가게 하여 한나라의 고구려 현(현도군에 속해 있던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여기서 보면 고구려가 고구려현을 빼앗았다는 내용입니다. 『양서』의 기록과는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와 현도군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고구려는 현도군을 쳐서 고구려 현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니까 현도군이 고구려가 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양서』의 내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현도군 안에 고구려 현이 있었고 『양서』를 기록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토대로 그 나라가 현도군에 속해 있었다는 의미로 서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현이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 시기에도 현도군에 속한 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현과 고구려국이 별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구려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 현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습니다. 고구려현이 곧 고구려란 나라가 되었다면 고구려현은 없어졌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한 의문이 남습니다. 주몽은 왜 고구려현이라는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라고 나라를 세웠을까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주몽은 고구려를 세울 때에 고구려 현의 존재에 대해 몰랐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이병도는 고구려라는 국호는 제 2대 유리왕 시기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정해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고구려라는 이름이 현도군의 치소였던 옛 고구려현의 이름을 따왔고 그곳이 국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병도는 다른 설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고구려는 지금의 서울과 같은 말로 한의 군현 설치 이전부터 사용한 말이고 졸본지역에서 일어난 나라도 역시 고구려라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후한서’(동이열전)에는 “무제(유철)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로서 현(縣)을 삼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도 역시 단군의 고대조선이 아니고 조선현의 위만 세력이며, ‘고구려’도 나라와는 다른 현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개마현이나 낙랑군도 다 우리의 개마국, 낙랑국의 이름을 훔쳐다가 군이나 현으로 격하시켰고, 그러니 위치도 바뀌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신채호가 “한(漢)이 위씨(위만)를 멸망시키고는 그 토지를 조선에 돌려주지 않고 스스로 군현을 설치하고, 또한 그 군현의 이름을 조선 열국의 나라이름에서 가져와서 지음으로써 조선열국을 모욕하였다”고 정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모욕도 모욕이지만,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는 위만이 망한 BC 108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습니다. 고구려국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이름을 빌려다가 땅 이름만 ‘고구려현’이라고 부르고 그 땅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않고 한(漢)이 강제로 통치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한(漢)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한사군을 계승하였고, 그래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현과 고구려라는 나라를 동일시하는 억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한나라에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고구려가 고구려현의 지배를 받은 것도 아니며, 고구려현의 정체는 현대식으로 볼 경우 주고구려 한나라 대사관으로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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