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자 약광 일본으로 건너가다

2023. 10. 30. 07: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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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자 약광 일본으로 건너가다.

약광은 고구려 28대 보장왕의 아들로 고구려 왕족이라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고구려 말기에 야마토 정권 치하 일본에 망명해서 현재의 사이타마현에 정착해 고구려 유민의 마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그의 후손인 고마(高麗) 씨가 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후손들도 자신들이 고구려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약광이 일본에 도착한 시기는 666년입니다. 고구려는 당시 나당연합군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신라에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들은 약광은 일본에 정착하기로 하였습니다. 약광왕은 1799명의 고구려인들은 716년에 일본 남부 작은 도시 히다카시 고마향, 일본에서는 고마, 즉 고려 혹은 고구려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약광이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적혀 있다. 그것은 바로 반란 때문이었다. 고구려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왕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천황의 명령으로 무사시의 고마로 이주했다.’ 『고마군개전기』
약광이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와 도착한 곳은 오이소해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약광은 8개의 돛을 올린 배를 타고 이곳 오이소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의 번성을 약속했고, 이후 오이소는 고구려소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약광이 고마군을 건설하기 직전에 치치부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광이 발견된 것입니다.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경제체제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통화의 주조도 필요했습니다. 동광을 발굴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던 것은 신라에서 온 도래인이었다고 합니다. 쿠네오유, 카타시오, 김상무는 동광을 발굴한 공로로 높은 벼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연동의 발견은 일본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동광이 발견되어 해당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되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변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광이 발견되고 8년 뒤에 고마가 건설된 것입니다. 8세기에 도래인이 고마군을 개척한 것은 황무지 개간과 더불어 해당 지역을 지키기 위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동북 지역에 에미씨라고 하는 아이누 족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이 일본조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해당 지역을 지켜야 했고 그럴려면 기술력도 필요했습니다. 

성천원 앞에 있는 고려왕묘(高麗王廟)라는 현판이 달린 약광왕 묘

현재에도 일본에는 고구려신사를 지키는 고마씨가 있고 이들 가문은 원래 사찰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고마군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무사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일본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속하여 무사의 역할을 하였고 보다 전문적인 모습을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마씨 27대에 이르러 가마쿠라 정부가 들어섰고 그에 따라 고마씨는 관동지방의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고마 가문은 가마쿠라막부와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면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마씨 32대 교코에 이르면서 180명에 이르는 부하들을 데리고 전장에 참여했다가 대가 끊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마 가문은 무사의 지위를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을까. 혹시 일본무사들의 성장과정에 도래인들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고마신사에 신으로 모셔진 인물이자 고구려 마지막 왕족 중 한명인 '고약광(王若光)'을 일본 중세사의 주역이었던 사무라이의 원조로 보는 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철갑 기마무사인 사무라이 집단은 철제기술이나 기마술이 현저히 뒤떨어졌던 일본 내에서 자생하긴 어려웠을 것이란 설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도래인 설이 제기됐지만, 과거에는 대부분 백제인이었을 것이란 설이 더 지배적이긴 합니다. 다만 일본의 철제기술, 기마술이 모두 한반도에서 전래된 점은 일본 내에서도 이견이 없다고 합니다. 반도가 본격적인 철기시대로 접어든 기원전 2세기~서기 3세기까지도 일본 내의 주요 유물들은 대부분 신석기시대 유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일본과 백제의 깊은 유대관계를 고려해 일본 중세를 지배한 사무라이 계층도 백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여기에 더해 고구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후대 사무라이 무사 집단 탄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약광이 일본 내 고구려 유민 1799명을 이끌고 관동지역에 이주, '고려군(高麗郡)'이란 고구려 마을을 세우고 이 지역에서 병력도 키워냈다는 일부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2세기 일본 역사 최초로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를 비롯해 그와 숙적이었던 헤이지(平氏) 가문 역시 일본 관동지방을 기반으로 성장한 군벌들입니다. 이 사무라이 집단들의 특징인 우수한 철갑과 기마술 역시 백제보다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당시 고구려를 비롯한 만주 일대는 몽골 및 중앙아시아 일대 국가들과 교역이 활발했고 전투용 기병과 기마술이 발전했지만 한반도 남부일대는 기마술이 그만큼 발전하진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지왜인전』이란 책에는 일본에는 말이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에 말이 들어온 것은 5세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사카에 들어왔고 관동지방에 말을 키우는 집단이 들어왔다고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최초로 들어온 지역은 관동지방이며 이들은 한반도 남부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실제 관동지방에는 말을 키우고 있던 마을이 발견되었고 한반도의토기와 마구가 출토되었습니다. 도래인이 말을 키우기 시작하여 관동지방에 확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록에서는 일본에서는 672년 처음으로 말을 이용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사키마타구분군에 장군산 고분이 있어 이것은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깃대꽂이는 고구려 기마무사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이며 같이 발견된 마주, 즉 말의 투구는 철로 만들어져 기마전투용장비로 당시 일본에서는 없던 장비였습니다. 그러니까 672년 이전에 이미 관동지역에는 기마무사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일본관동지역의 무사와 제철기술, 그리고 말을 이용한 전투술이 있었고 여기에 고구려인과 연관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투용 기마가 가능할 정도로 말의 크기가 커진 것은 기원전 2세기 이후 품종개량이 계속 이뤄진 후였으며 대체로 말 품종이 우수했던 중앙아시아나 몽골 등 유목민족들이 다수 보유했습니다. 농경민족들은 우수한 전마를 보유한 경우가 드물었으며 작은 말들을 전차와 연결해 기동력을 보유하는 전차술이 발전했습니다. 그나마 산악전이 훨씬 많은 한반도 남부 일대나 일본은 자체적으로 강력한 기마술을 보유하기 어려운 지역들이었고 좋은 말 자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싸움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들도 전쟁에서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도래인들을 데리고 와 말을 키우게 하고 마구를 제작하게 하였으며 생산거점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대 중세시대에 들어서 무사라는 존재를 탄생시켰을 거란 것입니다. 
약광은 우리에게 낯선 인물입니다. 약광은 한국 측 사서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만 전한다는 것이 그 이유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666년에 고구려에서 태대형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자가 야마토 정권에 사신으로 온 내용이고, 『속일본기』의 기록은 일본에서 약광에게 '고려왕씨'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현무약광과 고려약광이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약광과 함께 건너온 1천799명의 고구려인들은 세공, 직물, 철제 등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제 농기구를 도입, 농작물 수확을 극대화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철제 도입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종이제조기술까지 전파하였고 이들은 일본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무사집단도 형성합니다. 이것이 일본 무사집단의 시초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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