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군주 고구려 태조왕의 반격
2023. 11. 17. 09:1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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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대 왕은 태조왕이었습니다. 이름은 ‘궁’이요 어릴 때 이름은 어수였습니다.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부여인입니다.
태조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7세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전 모본왕은 즉위하자마자 왕자 익을 왕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모본왕의 태자가 자질이 부족하다하여 태조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계승을 하던 가문이 재사의 후손 쪽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왕위에 오르니 나이가 어려 그의 어머니인 부여태후가 수렴청정을 맡습니다.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정복군주 중 한 명입니다. 고구려 주변에는 북쪽에 부여, 서쪽에 후한, 남쪽에 후한의 낙랑군, 북동쪽에 숙신이 있었습니다. 태조왕 대에 요서를 공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부여태후가 섭정할 때의 일입니다.
태조왕은 동쪽을 안정화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또한 당시 후한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도 이유였을 것입니다. 56년에 동옥저 병합하였으며 68년 갈사국왕이 죽었는데 계승자인 도두가 스스로 투항했습니다. 태조왕은 그에게 우태라는 고위직을 주었습니다. 70년에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국을 병합하였습니다.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로 하여금 주나국을 치고 왕자 울음을 사로 잡아 그를 고추가로 삼았습니다. 조나국과 주나국은 성읍으로 개편했습니다. 그리고 두만강 너머 책성이란 곳에는 서기 98년 직접 방문하였으며 월부터 10월까지로 반년이나 되었습니다. 수도를 떠나 국왕이 한 곳에서 반년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그 지역이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태조왕은 책성에서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열고 관리들에게 물건을 하사하였으며 바위에 공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재위후반기에는 한나라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105년에 요동의 요새 지역으로 들어가 6개 현을 공격했다가 가을 9월에 요동태수 경기에게 격파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런 기록에 대해 허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이 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요동군의 여러 군이 함락되었다는 것입니다. 112년에는 예맥, 현도군 등을 공격했으며 118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군, 낙랑군 화려성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한편 121년에는 고구려를 향한 후한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 공격이 고구려의 침공으로 인해 당한 것을 되갚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침공을 견뎌내고 이제 고구려를 정벌하려 더 이상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응징의 차원인지 알 수 없지만 121년 정월 유주 자사 풍환, 요동 태수 채풍, 현도 태수 요광은 산하의 무력들을 동원해 요동 새를 넘어 고구려 땅을 침략합니다. 후한세력의 침략에 태조대왕은 아우 수성에게 5000의 군사를 주었습니다. 2000명의 군사들로 적들이 더 깊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한편, 3000명의 군사를 몰래 이동시켜 요동군과 현도군을 들이쳤으며 이 때 상당한 타격을 주어 후한은 침략을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유주 자사는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낙군과 요동속국 기병 3000명까지 동원해 반격하고자 했습니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이미 고구려 영내로 철수하여 더 이상의 추격은 어려워졌습니다. 121년 4월 고구려군은 선비족 군사 8000명과 함께 요동군 요수현으로 다시 쳐들어가 관리들을 처단했습니다. 요동 태수 채풍은 고구려군을 추격하다 신창현(양평현 동북)에서 고구려군과 만났습니다. 양군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채풍을 포함한 요동군 고급관리 3명을 죽였으며, 병사 10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121년 11월에는 고구려군과 협동한 선비족 군사들이 현도군을 습격했으며, 12월에는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직접 고구려 마한 예맥의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 공격합니다. 이 전투는 2개월간 지속되었으며 부여가 후한세력에게 지원군을 보내자 고구려는 더 이상의 공격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현도 태수 요광의 처형과 유주 자사 풍환의 투옥, 옥사사건이 일어나는 데 아마 이 때 이루어진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략에 따른 후한의 손실이 원인이 된 듯합니다.
‘고구려의 수성 등이 포악하고 무도해 목을 베고, 그 살은 젓갈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하다. 허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죄를 빌며 항복을 청했다. 선비, 고구려(예맥)는 해마다 노략질을 하고 우리 백성을 잡아갔다. 그 수는 수천에 달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성이 귀환시킨 수는 겨우 10~100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한나라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번에 포로를 귀환시킨 이후 (우리 후한의) 현관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앞으로 스스로 포로를 돌려보낸다면 모두 돈으로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속전의 금액은) 한 사람당 비단40 필을 주고 어린 아이는 그 반으로 한다.’ 『후한서』
이는 122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121년에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고 해를 넘긴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북쪽에서 부여의 왕자 위구태가 현토의 지원군으로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고구려군의 포위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69년(121)〕 12월에 왕이 마한(馬韓)과 예맥(穢貊)의 기병 1만여 기를 거느리고 현도성(玄莬城)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 부여의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0,000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대항하여 싸우게 하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기』
한편 이러한 고구려의 침략에 대해 고구려는 약탈경제로 나라를 유지해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루어진 것도 고구려가 단독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선비와 연합해 벌인 일이었습니다. 고구려와 선비는 함께 중국인을 잡아가서 매매하고 그 이익을 나누어가졌습니다. 중국왕조의 몸값지불은 오히려 고구려의 약탈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26년~167년 사이 고구려는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였고 적지 않은 사람을 잡아갔습니다. 146년 8월에는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잡아오기도 했습니다.
‘94년(146)〕 가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현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왔다.’ 『삼국사기』
처자를 잡아왔다는 것은 납치일 것입니다. 아마 서안평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구려군은 매복했을 것이며 대방군 수령이 이끄는 병력이 서안평으로 접근할 때에 습격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납치된 자들은 편지쓸 것을 강요받았고 처자가 고구려에 억류된 상황에서 낙랑태수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낙랑과의 외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수와 당과 같은 농경제국에 맞서면서 선비, 말갈, 거란, 돌궐 등의 유목민을 자신들의 위성 세력으로 포섭한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교활함을 갖춘 수렵민의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약탈이란 표현이 좀 그럴 수 있으나 생존이 불리한 자연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고대국가 고구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농경문화를 가진 중국 한족과 선비, 유연, 돌궐, 거란 같은 유목민들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쪽으로부터 정치환경을 이해하고 습득해 나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유목민들에게 이익을 주는 대신 그들의 힘을 빌려 약탈 작전에 동원한 것입니다. 또한 서기 1세기에 자연재해가 있을 테면 불리한 자연조건의 고구려는 선택할 수 있는 더 좁아졌습니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고구려로 하여금 대외 확장하게끔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고구려에 대외확장이 누군가에게는 침략이 될 수 있고 고구려 입장에게 군공이 되는 것이 상대국에게는 고스란히 피해로 남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축소하여 쓸 것이고 은폐하는가 한편 큰 피해를 받았음에도 마치 아무런 일이 없는 듯 기술할 수 있고 피해를 받았지만 자존심이 상해 저들이 항복했다고 쓸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 때 활발한 대외정복 활동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따라서 누군가는 약탈을 통해 고구려의 경제기반을 유지해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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