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는 왜 세워졌을까.

2024. 5. 6. 07: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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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은 담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제법 알려진 인물로 『삼국사기』 기준으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의 13세손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8세(만 17세)에 보위에 올라 39세(만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까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특히 전쟁에 대해서는 한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복자이자,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를 대중들이 가장 자주 붙여 부르는 군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삼국사기』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인 군주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인간적인 부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혀 없고 땅을 넓힌 것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본기」에서는 그가 어떤 말을 남겼는지 기록해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광개토대왕조의 유일한 말은 북연의 왕인 모용희가 ‘고구려의 성벽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서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가겠다.’고 떠벌린 말 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모용희의 허풍으로 끝났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어떤 신하를 아꼈을까. 그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의 왕비조차 알 수 없는 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 지나치게 빈약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식으로 장수왕이 있었지만, 그 외의 자식은 기록되어 있지는 아니므로 그에게 과연 단 한 명의 자식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지 22년만인 412년 10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 사유에 대해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광개토대왕을 이은 장수왕에 대한 기록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70년 가까이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장수왕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생각될 뿐, 그가 재위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록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장수왕조의 기록에서는 어느 해에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김부식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누락했는지 의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김부식이 역사를 기술할 시기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대한 기록이 이미 유실되어 전해져 오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부식은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 기록은 아예 삭제해 버리거나 이를 비판하는 사론은 달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역사를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기록을 누락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것입니다. 
  ‘조왕, 선왕은 다만 원근의 사람들에게 묘를 지키게 함에 청소만 하게 했다. 나는 구민이 쇠약해질까 염려된다. 내가 죽은 다음에 묘를 지키는 자는 다만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약탈해 온 한예를 취해 청소하게 한다.’
  이 내용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우면서 자신의 조상을 언급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조왕은 고국양왕이고 선왕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입니다. 한 마디로 왕묘를 돌보는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게 위해 노예를 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나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라 할 수 있습니다. 압록강 북안의 국내성 근처(현 지명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에는 높이 6.39m, 무게 37톤에 달하는 응회암으로 만든 거대한 비석, 중국에 있는 비석 가운데 거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럼 장수왕은 왜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을까. 
  비문에서는 장수왕은 재위 2년 (414년) 9월 29일에 광개토대왕을 안장하고 그 능 앞에 비석을 세웠다고 하니 왕의 사후 곧바로 능비를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그거 하나만 있지는 않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 단서는 이 비가 광개토대왕비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 능비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황제의 비라고 알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를 자칭하는 것으로, 천자란 하늘을 대신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신인 하늘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으로 볼 때 왕위의 권위를 신성시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이 비석의 첫머리인 만큼 아마 전제왕권을 수립하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광개토대왕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보이는 권위처럼 고구려는 왕권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자로 알려진 주몽은 5부족의 하나인 계루부의 수장에 불과했습니다. 부여에서 압록강 유역의 비류수 졸본지역으로 이주한 주몽의 계루부는 또다른 부족인 소노부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연맹체의 맹주로 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질적인 지배로 이어지고 다른 부족에게 미쳤다고 보기 힘듭니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게 따로 제사지낸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다른 부가 자체의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주몽의 계루부가 다른 부들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구려의 왕의 자리는 불안했습니다. 근신 두로는 모본왕이 잔인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살해했으며 연나부 출신 조의 명림답부도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대왕을 제거했습니다. 봉상왕도 기근에 무리한 왕궁 보수 공사를 벌이다가 국상 창조리에 의해 물러났고 이후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의 왕권은 생각보다 미약했고 그것은 천도로 이어졌습니다. 유리왕 22년(서기3년)에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했고, 산상왕 13년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천도했으며 동천왕 21년(247년) 평양성으로 천도했다가, 고국원왕 12년 (342년)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가 이듬해 다시 평양성으로 환도합니다. 물론 동천왕21년과 고국원왕의 13년의 경우는 위나라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부의 권력 다툼도 한몫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리왕 때에는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그 뒤를 이은 대무신왕은 동명왕묘, 즉 주몽의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주몽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왕실을 잇는 정통으로서 어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대에 어느 정도 왕권강화에 성공했다는 것을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두루묘지에 모두루가 자신을 노객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귀족 내지 관료들이 상대적으로 왕권으로 예속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때 북부여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활약한 귀족출신 인물입니다. 또한 광개토대왕을 생전에 ‘영락태왕’이라 했으므로 왕보다 상위의 개념인 태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붙일 만큼, 왕권이 신장되었다는 것이고 장수왕은 부왕의 강력한 권위에 의지하여 전제화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일련의 정책들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 일이 평양으로 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양 천도가 남하 정책의 일환이라는 기존의 통설도 있으나 장수왕이 본격적으로 남하정책을 펼친 것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무려 48년이 지난 장수왕 63년(475년)이었습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는 왕권을 절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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