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은 왜 평양성으로 천도했을까

2023. 9. 11. 11: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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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은 고구려의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겼습니다. 평양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이 있던 곳이고, 고조선 멸망 후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전부터 뛰어난 경제력을 지니고 문화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국내성 지역은 지형적으로 협소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도읍으로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미천왕 대에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구려는 평양지역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에게 평양지역은 고국원왕이 백제와 싸우다가 전사한 장소이기도 하고 광개토대왕 대에는 이곳에 9개의 절을 지어 평양건설에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국내성으로 도읍이 옮겨질 대에는 유리명왕 대에 교제에 쓰일 돼지가 국내 위나암으로 달아나는 사건을 계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평양천도에 대해 구체적인 경위나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의 영토사업은 고조선 땅에 대한수복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발견된 벽화무덤은 고구려의 유주자사였던 진의 무덤이며, 벽화에 반영된 유주는 13군 75현을 거느린 고구려의 유주였습니다. 그럼 이 시기에 고구려는 고조선 땅 수복 사업을 어느 정도 완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가 영토확장 사업을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한반도 남부로 말머리를 돌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양천도는 고구려의 삼국통일과정과 그 투쟁 속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375년 고구려에 의한 수곡성 함락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수곡성 전투는 고구려 삼국통일을 위한 신호탄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377년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한 데에 대하여 고구려가 반격하며 백제로 쳐들어갔고 378년에는 거란이 고구려를 침범하여 주민들을 데려갔습니다. 380년대 초 후연침략 세력의 대두, 380년대 후반기 백제와의 일진일퇴 등 일련의 사건들은 고구려에게 남방정책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378년과 388~389년 고구려에서는 심한 가뭄과 병해충의 피해로 농사가 잘 안되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자 이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구려의 확장정책에 장애물이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고구려의 남방진출은 광개토대왕 대에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고구려는 396년 백제에 대한 또 한 차례와 대규모적인 공격을 단행하여 50여개 성을 함락시켰고 계속하여 백제 수도성에 대한 압박 공세를 취하여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녀생구(노비) 1000명, 가는베 1000필, 58개성, 700촌 지역,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의 볼모 등을 획득하였으며 이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이를 구원하였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보면  신묘년(391), 영락 6년(396), 10년(400), 14년(404), 17년(407)의 사건은 남쪽의 백제—가야—왜 세력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이고 나머지 영략 5년(395), 8년(398), 20년(410)의 사건은 비려, 식신, 동부여 등 북쪽방면에서 이루어진 것들로 북방진출이 3번, 남방진출이 5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정세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안정화되면서 평양천도를 단행했다는 것입니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거처였다.’ 『삼국사기』

동천왕 21년(247)에 고구려는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 사직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선인 왕검의 거처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살던 곳 즉 고조선의 수도를 의미합니다. 즉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고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가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왔다는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그 내막을 자세히 전하지 않아 후손들로 하여금 추측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부식은 1135년에 서경(평양)에서 일어난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김부식은 당시 서경이라 불린 평양귀족들과 안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 평양천도라는 고구려에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단 한 줄만을 남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한편 고구려의 천도는 남쪽에 인접해 있던 백제, 신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후 475년 장수왕의 한성함락과 한강유역 장악은 백제의 웅진천도(熊津遷都)로 이어졌고,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통해 강성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나 삼국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정말 옛 고조선의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고 남하정책을 계획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서기 386년 선비족이 북위를 건국합니다. 북위는 화북 이북을 지배하는 신흥강국으로 떠오릅니다. 혹시 고구려가 북위가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아닐까. 북위와 경쟁하던 북연이 멸망한 것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9년이 지난 436년의 일이고 3년 후에는 북위가 화북지역을 통일합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북조는 물론 남조와도 사신을 보내 국교를 수립합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고구려의 외교책으로 당시 고구려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외교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던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아마 북위의 눈치를 보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보다 국내성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린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설이 요청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광개토왕 이후 점차 대두되었던 것이 그 이유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유를 대라면 새롭게 떠오르는 북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보다 국내성기반의 귀족들의 세력역화가 더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평양천도 이전에 중국왕조가 강성해진다고 해서 도읍을 옮기면서 그들과의 승부를 피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대동문. 옹성이 헐린 뒤라서 원형에서 다소 변형되어 있다.

그럼 평양천도는 과연 남하정책과 얼마나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것은 427년이지만 장수왕이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한 것은 48년이 지난 475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연 평양천도의 목적이 남하정책이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게 합니다. 그리고 장수왕이 백제를 공략한 것에 대해 북위 헌문제에게 보낸 백제의 국서에서는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개로왕)의 국토를 침범하여 선군의 옛 원수를 갚는다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장수왕이 백제를 공략한 것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국원왕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전이었습니다. 적어도 백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위에 보낸 백제국서에서는 장수왕에 대해 ‘나라는 어육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들의 살육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 글에는 장수왕의 폭정에 대해 과장되었다고 본다면 적어도 이 문장과 관련하여 고구려에서는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었고 이를 장수왕이 제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남하정책보다는 국내성귀족의 기반약화라는 숙제를 풀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관련한 대규모 숙청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고구려는 백제를 왜 공략했을까. 바로 한강유역이 갖는 경제성이 갖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지역을 차지하여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도망가는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을 더 이상 쫓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목표가 백제 멸망이 아닌 한강유역확보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평양천도는 백제와 신라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에 조공하던 신라는 그 정책을 고민하게 되었고 때마침 백제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자 신라는 이를 수락합니다. 평양천도의 진실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 천도가 백제와 신라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향후 삼국전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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