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전동고분군, 우리가 모르는 또다른 가야

2022. 11. 17. 08:1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728x90

옥전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이 발견된 것은 1985년 여름이었습니다. 수풀과 나무가 가득차 그동안 발견되지 못하다가 발견된 것으로 봉토분 27기를 포함한 많은 지하 무덤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의 가야고분군은 가야고분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이러한 옥전고분군은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라국 수장층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철제유물로 말갑춤과 무기, 갑 옷등이 춭토되었고 특히 이곳에 출토된 말머리가리개는 일본 와카아먀시 오타니고분에서 출토된 말머리가리개와 그 모습이 유사하여 가야지역에서 제작된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다라국은 말과 사람이 갑옷을 갖춰 입은 중장기병이 실재한 나라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구슬과 목걸이, 백제와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 관모와 신라와의 교류를 알 수 있는 금동관도 출토되었습니다. 당시 다라국은 이들과 교류하며 성장했는데 아마 백제와 신라가 교차하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로만글라스도 출토되어 서역과 교역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로만글라스가 신라고분에서만 출토되었는데 옛 가야지역에서 발견되어 기존의 통념이 깨진 것입니다. 어쩌면 지중해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가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로 유입되었고 이후 다시 가야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쉽지만 당시 우리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글라스를 제작하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이런 경로로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 당시 다라국은 서역과 직접 교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옥전 고분군에서는 로만글라스와 더불어 창녕계 토기 등 신라 계통의 유물이 나오고 거대한 봉분 무덤이 출현하니 당시 5세기경 신라에서도 높은 봉분의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신라와의 교역을 통해 이러한 모습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남합천군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

이와 더불어 옥전고분군 남쪽에는 성산토성이 있는데 이곳은 옥전고분군의 주인들이 살았던 성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나지막한 곳에 자리한 토성벽의 둘레는 약 1.1km로 성의 위치는 황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관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곳은 내륙수운의 요충지입니다. 그리고 이 성의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했고 남쪽과 동쪽, 북쪽은 흙과 돌을 이용했는데 따라서 석성 혹은 토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토석양축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다라국은 무엇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가야 외에 또다른 가야가 있던 것일까. 다라국(多羅國)은 삼국시대 전반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었던 가야계열 소국으로 알다라국이라는 이름은 중국 측 기록인 양직공도(梁職貢圖)와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용봉무늬 등근고리자루큰칼 이른바 용봉문환두대도가 발견되었는데 무려 4점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이전에는 무령왕릉과 천마총에서 화려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이 발견되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은 무령왕의 허리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용봉문환두대도는 왕의 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서도 천마총, 호우총, 식리총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용봉문 환두대도는 40여 점이 출토되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빼면 16점이고 그 중 옥전고분군에서 발견된 것이 7점입니다. 그리고 옥전에서 발견된 칼은 백제와 신라의 칼과는 달랐습니다. 옥전의 칼은 칼이 칼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칼코등이 있는데 백제는 이러한 장치가 없었으며 백제가 고리와 문양이 하나인 일체형이라면 옥전의 칼은 분리형입니다. 그리고 고리에 문양을 끼우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는데 신라 호우총칼은 홈을 파지 않고 칼을 고리에 끼우는 것이었으나 옥전의 것은 L자로 홈을 파고 문양을 접합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옥전에서 발견된 것들이 백제나 신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옥전에 있던 정치세력이 백제나 신라, 혹은 중앙정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외교를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옥전에는 또 다른 가야가 있던 셈입니다. 그런데 옥전이 있던 합천 주변에는 과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있었고 함안의 아라가야가 있어 이들의 영향 아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옥전고분군과 그 유물들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경남합천군옥전고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그럼 이러한 강력한 정치집단이 옥전에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옥전의 고분군에서 23호분은 그 크기가 다른 것보다 크다고 합니다. 아마 이 고분부터 대형무덤이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덤에서는 전혀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말띠 드리개, 금동제 화살통, 금동장관모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김해와 부산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부산과 김해 등지의 강력한 정치세력이 옥전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그 시기를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에 의한 한반도 남부 정벌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정벌로 한반도 남부일대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때 김해, 부산의 일부 세력이 옥전으로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옥전의 세력은 자체 생산하는 옥과 철을 경제력으로 삼아 자신들의 왕국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 곳은 주변국들의 세력다툼의 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옥전의 세력은 스스로 방어할만한 힘이 있어야 했고 따라서 현재 이곳에는 말투구를 비롯한 여러 철제 군사 유물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가야의 고분군은 세계 유산 등재신청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논란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라’라는 명칭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어떠한 역사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다라’이며 옥전고분군 동쪽에 쌍책면 다라리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라’라는 며잉은 중국의 외교문서인 양직공도와 일본서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일본서기에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369년 가야7국(비사벌,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백제,왜 연합의 공격을 받음’
『일본서기』

옥전 고분군 M3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와 연합하여 다라를 공격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369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임나 7국을 점령한다는 임나7국에 다라국이 들어있으므로 만약 다라국을 인정한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비단 다라만의 문제가 아닌 다라를 포함한 7개 지명에도 해당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일본식민사학계도 다라국을 현재의 합천으로 보고 있는데 이 지역을 한국주류사학계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에 등재시키면서 ‘다라’라는 지명을 포함하면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사학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 남규슈 가고시마에 정착한 후 토착세력을 흡수하여 방어용 산성을 쌓고 고쿠부 평야를 개척했는데, 벼농사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 남규슈 일대를 장악하여 고나고쿠이라는 연합왕국을 건설했다.’ 아라타 엥세이 「신무천황의 발상의 본관」
일본의 역사학자는 오히려 가야가 큐슈를 지배했다고 말합니다. 정말 사실일까. 실제로도 ‘다라’라는 말은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 그 지명을 많이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옥전에 잇던 용봉문환두대도 그리고 같이 발견된 철제 갑옷과 로만 글라스, 옥구슬 등 출토된 유물들만 보면 옥전의 땅을 비좁기만 합니다. 어쩌면 6가야 외에 우리가 모르는 강력한 가야가 존재했고 세력을 떨쳤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용봉문환두대도’를 후대에 남긴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겠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