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로 진출한 대가야
2022. 11. 28. 07:5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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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가야연맹체(加耶聯盟體)의 한 나라로서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고대국가 시절 전라도는 백제땅, 경상도는 신라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인데 그것은 삼국통일에 가까웠던 6세기 중반 이후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백제와 신라 외에도 전라도의 마한세력과 경상도 김해, 부산, 고령, 합천을 세력으로 둔 가야가 나름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고령은 경상북도 남단에 위치한 도시인데 경상도 자체가 온전히 신라의 세력권이 아니었던 것이고 일부는 가야의 세력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2006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가야 계열의 고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전남 순천시 서면 운평리 마을 야산 구릉에서 발굴한 4~6세기초 작은 무덤인데 5~6세기 경북 고령에 근거지를 두고 번영했던 대가야 고분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함께 나온 부장품(껴묻거리) 토기들 또한 대가야 토기와 거의 같은 수입·모방품들이고, 좀더 시기가 이른 4~5세기 구덩널무덤(토광묘)에서는 경남 서부 소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은 대가야가 전라도 동부를 통치했다는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지역에서 대가야의 지역과 유사한 토기가 나왔다는 것은 이 지역의 세력들이 대가야의 문화를 받아들여 토착화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일본서기』에서도 가야와 백제가 전라남도 동부 일대 4개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두고 다투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자는 백제가 되었습니다. 아마 순천도 그 지역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2019년에는 전북 장수 삼고리 고분군에서 1500년 전 가야계와 백제계 토기가 섞여 출토되었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가야계 물결무늬 장경호(목 긴 항아리)와 통형기대(원통모양 그릇받침) 7개 묶음과 장군, 다양한 철기류였습니다. 장군은 물·술·간장이나 오줌 등 액체를 담는 데 쓰는 길쭉하고 입구가 작은 그릇입니다. 이러한 장군은 종래 완주 상운리 고분군과 군산 산월리 고분군, 서울 몽촌토성 등 마한과 백제 시대 무덤과 토성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발견의 이 지역의 거주집단과 다른 집단과의 교류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 4현(상다리·하다리·사타·모루)을 청했다. 그러자 다리국수 수적신압산은 ‘이 4현은 백제와는 인접해있지만 일본과는 떨어져 있으며, (백제와는) 아침 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백제에 할양하는 편이 낫습니다’고 말했다.” 『백제서기』
여기서 임나 4현은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동남부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서기의 기사를 백제입장에서 풀이하면 백제 무령왕이 이 지역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누구로부터 회복했을까. 바로 대가야입니다. 무령왕의 재위기간이 재위 501~523년이었고 이전에 백제에 있었던 큰 위기는 475년에 있었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의한 개로왕 피살 사건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아마 전라도 일부지역에 대해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틈을 치고 들어온 것이 바로 대가야였는데 당시 대가야는 남제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 기세는 무주, 진안, 장수 등지로 세력을 확장할 정도였습니다.
전라도에 있는 가야의 흔적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전라남도 순천 신도심과 구도심을 잇는 덕암동 유적에서도 가야계 무덤(석곽묘)과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전북 남원과 장수ㆍ임실 등에서는 가야의 제철 유적이 다수 발굴되었습니다. 철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가야이지만 이러한 가야의 중심지라고 하는 김해와 고령에서는 제철유적이 발견된 바 없고 전라도에서 가야의 제철유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남원시와 장수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아막산성이 있는데 이곳에 백제와 신라토기 뿐만 아니라 대가야의 토기파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막산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5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토착세력의 토기와 함께 대가야양식의 토기가 발견되었고 철제투구와 목가리개, 은상감 큰고리칼 역시 대갸아야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고분은 백제의 것으로 여겨온 터였습니다.
경상북도 고령의 대가야의 유물이 전라북도 남원, 임실, 장수, 진안 등 호남동부 지역에서 발견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유적지에서 가야계 고분들이 산정상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고분에서 나온 유물들이 대부분 대가야의 것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대가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힘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풍부한 철산지를 바탕에 둔 제철기술로 보고 있습니다. 『세종실록』에서는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에 있는 한 야산에서 제철유적지를 발견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3대 철 생산지였으니 고대시기에도 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철을 가지고 급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중엽부터 고령 서부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합천을 지나 함양, 남원으로 진출하였으며 대가야가 지나간 곳에 그들의 고분을 만든 것입니다.
그럼 대가야가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5세기 고구려는 한반도 남쪽으로 남하하였고 백제와 신라를 이를 막아내야 했습니다. 이 때 가야는 서쪽으로의 진출을 노렸습니다. 대가야는 이러한 진출을 통해 중국과 일본과 교류합니다. 고령지산동에서 춭토된 유물 중에는 야광조개가 있는데 이는 일본 최남단인 오키나와에서만 나는 것으로 규슈를 거쳐 수입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가야의 문물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일본 전역에서 고령지산동에서 발굴된 유물과 같은 계열의 것들이 출토되었는데 풀잎이나 꽃잎 모양의 솟은 장식이 금동띠고리에 꽂혀있는 대가야의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쓰야마고분에서 나왔고 대가야의 대표적인 유물로 장식을 사슬로 엮어 늘어뜨린 금귀걸이 역시 일본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대가야는 중국과도 교류했는데 6세기초 『남제서』에는 479년 대가양의 하지가 사신을 보내 제나라에서 ‘보국장군본국왕’이라는 작호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이는 대가야가 국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럼 경상도 내륙의 대가야는 어떻게 중국, 일본과 교류할 수 있었을까. 한편 전라북도 부안군 죽막동이라는 곳에서 5세기에서 6세기 초에 쓰인 대가야의 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마 대가야는 이 죽막동을 항해거점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 위해 대가야는 고령에서 낙동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를 들러 남해로 돌아 죽막동에 왔으며 이 곳을 통하여 중국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5세기 이후에는 가야 세력은 더 이상 낙동강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신라세력이 팽창해 낙동강 바로 동쪽까지 진출하여 가야와 국경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가야는 육로를 개척해야 했고 백제의 간섭을 피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가야는 섬진강 길을 택했고 백두대간을 넘어 호남 동부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남원분지에 세력을 뻗친 대가야는 요천을 이용하여 섬진강 하구로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전라남도 고락산성에는 대가야의 유물이 나왔으니 이 지역의 주민들이 대가야의 정치문화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섬진강은 대가야의 새로운 교역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력회복에 나선 백제와 혼인동맹을 수단으로 대가야를 복속시키려 했던 신라의 야심 속에 대가야는 점점 힘을 잃어갔습니다.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의 왕녀와 결혼했던 것도 백제와의 압박 속에 섬진강을 이용하지 어렵게 되자 낙동강길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틈 속에서 멸망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일본과 중국과 교역을 하며 한반도의 남부의 당당한 세력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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