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는 여전사가 있었다.
2022. 11. 30. 07:5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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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고분군에서 가야의 유물이 나왔는데 지배층의 무덤인 이곳에서 3골의 인골이 나왔습니다. 나란히 누워있던 인골은 2개의 인골은 전신이 남아 있었으며 하나는 하반신만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주피장자의 북쪽, 발끝 쪽에 순장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순장자들의 정보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나이는 20~30대 초반으로 추정되었으며 키는 엉덩이에서 무릎사이의 뼈 길이로 알 수 있는데 각각 152.6㎝, 148.7㎝. 147.7㎝였습니다. 그런데 골반뼈를 보니 이들 모두가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1회, 2회 정도의 출산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여성의 대퇴골과 무릎 아래의 경골에서 근육이 발달된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리 근육을 많이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누구였는지가 수수께끼였습니다.
이 무덤에서 철제무기가 발견되었고 이것들은 주피장자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여성들의 인골 머리맡에는 총 6점의 투구가 발견되었습니다. 투구를 복원하였더니 약간 밋밋한 형태로 가죽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투구위에 쇠로 만든 복발이 있는 지배층의 투구와는 확연히 다른 형태로 대성동 57호분의 투구는 격이 낮은 것으로 보았으며 순장자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예안 57호분의 무덤은 지배자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 인골의 주인은 여성이었고 지휘관의 상징인 칼과 전사들이 가지고 있는 창도 나왔습니다. 따라서 57호분에서 여성 세 인골의 주인은 가야의 여전사였던 것입니다.
여전사는 낯설기만 하면서도 멋있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신화에 보면 아이를 낳으면 여자를 살리고 남자를 죽인 아마존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며 아마존은 여전사의 대명사로 여겼으니 남미에 있는 아마존강도 이 곳에 여전사들이 많이 보여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기록서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에도 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국 풍속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했다.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으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돼 명칭만 남아 있다. 봄철에 들어오는 남자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빌려 온 것으로 이는 한때의 습속일 것이다.…’ 『성호사설』
이는 『직방외기』라는 책을 인용한 것인데 이 책은 명나라 때 이탈리아 선교사의 저서로 학자들은 이 여국이라는 곳을 카자흐스탄이나 터키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화속의 여전사의 후손으로 알려진 사르마티아인들의 이야가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3세기 정도까지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활동하던 이란계 유목민족입니다. 이 민족은 모계사회라 여성의 지위도 높았으며 이들 사회에 여전사들도 많아 사르마티아인들의 무덤에는 전투 중 다친 것으로 보이는 시신과 함께 무기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세유럽에서도 성메리 기사단이나 이슬람군대를 물리친 중세 스페인의 토르토사 기사단도 이러한 여성전사집단이며 이슬람교에서도 과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경호부대 중 여성 경호부대에 대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몇몇 국가들도 여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여성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총 11개국 정도가 있는데 대표적인 국가로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들 국가에서 여성에게 징병을 요구하는 의무는 ‘양성평등’이라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도 한 몫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북한도 여성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만 북한이 여성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이유는 양성평등이라는 것보다는 전시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고대의 여전사들은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아무래도 양성평등이라기보다는 그 나라가 생존하기 위한 절박함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는 황릉을 조성하면서 순장을 대신하여 토용을 만들어 넣기도 했는데 여군 기병의 모습도 나왔습니다. 이들은 한나라에 포섭된 유목기병인 것으로 보았는데 남성 전투기병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유목민족들도 여성병력을 운영했다면 아마 부족한 병력들을 보충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아마 가야도 이러한 이유로 여성을 전사로 내세워야 하지 않았을까요. 여성이 전사로서 싸움에 참여하는 상무정신이 투철한 나라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야는 왜 여전사를 운영했을까요. 4세기 무렵은 금관가야가 성장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당시 금관가야의 유물을 보면 부장품에서 무기류가 많아지고 무기가 개량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창은 자루를 보가 깊게 끼울 수 있도록 하였고 못까지 박아 자루를 단단히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부분은 굉장히 뾰족했는데 단면이었던 모양도 다이아몬드모양으로 바뀝니다. 3세기의 화살촉은 목이 없는 철촉에 단면도 타원형이었던 것이 날카로운 삼각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즈음 철갑옷이 확산되었고 등자도 사용되어 말 위에서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가야는 기마전술을 도입하고 투구와 철갑으로 전사를 양성한 것입니다. 가야가 이렇게 국방에 힘을 쓴 이유는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백제의 58개 성을 빼앗는 등 한반도 남부를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구려의 한반도 남부정벌은 백제와 신라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신라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중심의 천하질서에 편입하기로 했지만 백제는 정면대결을 택했습니다. 지카쓰아스카(近つ飛鳥·가까운 아스카라는 뜻)’ 박물관의 관장 시라이시 다이치로는 백제의 아직기가 왜왕에게 2필의 좋은 말을 선물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왜왕이 받은 말은 단순한 선물 차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4세기 후반까지 일본에 말이 없었는데 백제와 국교를 맺으면서 말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5세기에는 말을 순장한 것이 발견되었는데 한반도에서 건너온 말이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할 시 단독으로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왜에게 동맹을 제의하였고 칠지도는 그 징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5세기전까지 일본의 갑옷은 보병용 판갑이었는데 5세기 후반부터 기병을 위한 비늘갑옷인 찰갑이 등장하고 이는 백제가 고구려 찰갑기병에 맞서기 위해 기병을 대량 육성해야 했고 왜에 말을 공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키우고 마구를 만드는 기술자까지 백제가 보냈다고 합니다. 한편 칠지도는 일본에 전해진 것을 369년이라는 통설이 있는 가운데 408년이 유력하기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백제는 당시 고구려의 공격에 어려움에 처했는데 395년에 고구려군에 패했습니다.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의 압박에 부닥친 백제 아신왕은 397년(아신왕 6)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인 전지를 일본에 인질로 보냈는데 따라서 칠지도를 보내 왜왕으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약속받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에 공세에 어려움에 처하면서 가야는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총동원비상체제에 돌입하니 가야 여전사의 등장의 등장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야는 고구려에 비해 상당히 작은 나라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 왕조와 대결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고 이러한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가야는 무기의 선진화와 더불어 병력증강에도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가야의 병력증강 사실을 생각해 보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지키입니다. 하지키는 가마 없이 500도 안팎에서 구워낸 연질 토기로 생활토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가야에 건너와 생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건너왔을까. 아마 가야가 병력증강을 위해 일본에서 공급된 노동력이 군사력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왕의 지휘 아래 중국과 북방유민민족과의 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고구려의 군대를 이겨낸다는 것은 가야에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야 여전사의 출현은 어쩔 수 없는 국가적 선택이었지만 앞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야를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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