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그리고 일본서기
2023. 7. 8. 20:1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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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일본서기』라는 역사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근래에는 간혹 활용하여 한국고대사에서도 필요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있는데요. 하지만 모든 사료에는 비판적인 사고와 수용이 필요하고 이것은 『일본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일본서기』에는 한일 고대사의 쟁점인 임나일본부설을 담고 있습니다.
문화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습니다. 보다 선진적인 쪽에서 덜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고대 한일 관계에서는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그 관계는 일방적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일 고대사의 일반적인 흐름에 제동을 거는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입니다. 『일본서기』에는 4세기중엽 한반도 남부의 낙동강 유역 일대, 그리고 가야와 관련된 영역을 천황이 직할하는 영역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6세기 중엽 신라에 복속될 때까지 그 지배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는 그 곳을 위해 설치된 통치기관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주변 나라를 침략하면서 설파되었으며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었고 1945년 일제강점기기가 종말을 맞은 이후에도 이 학설이 없어지기는커녕 점차적으로 보강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백제가 일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를 백제가 일본에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사학계는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외면해왔는데 1970년대에 논리를 가지고 반박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사학계도 기존의 입장에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지배시기를 200여 년이 아닌 6세기 초로 한정시킨다거나 임나일본부도 정치 기관이 아닌 사절이 상주하는 곳 내지는 일부 집단이 거주하는 곳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사학계 역시 임나일본부 문제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임나일본부설은 주장되려면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 남부에 그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 유적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20세기초반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그것들을 입증할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서에는 임나일본부설를 뒷받침할만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측에선 누락시킨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왜가 신라의 깊숙한 곳까지 침입한 것을 기록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빼놓았다는 것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720년에 『일본서기』가 쓰여졌는데 이보다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의아한 것은 이 『고사기』의 편찬이 완료되고 나서 불과 2년 만에 새로운 사서 즉 『일본서기』의 저술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새로이 편찬된 『일본서기』에서는 이전에 편찬된 『고사기』의 기록들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앞서 편찬된 『고사기』의 기록들을 부정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물론 『일본서기』도 『고사기』가 인용한 자료들을 인용했을 것입니다. 비교적 단시간에 완성된 『일본서기』의 양이 『고사기』보다 많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바인데요. 그리고 『고사기』의 편찬담당자이자 당대 이름 있는 문장가인 태안만려가 『일본서기』의 집필에는 제외되었다는 점은 이전 문헌 『고사기』가 당시 집권자들의 불만을 샀고 따라서 새로운 역사서 편찬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두드러진 차이점 중의 하나가 바로 임나일본부설의 게재 여부입니다. 『일본서기』가 『고사기』에 비해 내용이 방대해진 이유는 없는 내용을 보완했기 때문일텐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임나일본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는 왜의 신공황후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 7국을 평정한 다음 고해진(강진 지역으로 추정)을 거쳐 침미다례(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를 정복하였고, 그 침미다례를 백제에게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달렸는데 대략 첫째는 마한 전체에 대한 정복, 둘째가 5읍만 정복한 부분적 정복, 셋째는 해남 지역 마한에 대한 일회성 급습으로 보는 입장 등입니다. 이 기사에 대해 이병도는 왜의 응원군이 와서 더불어 경략하였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지만, 근초고왕의 부자가 전남지역에 원정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았으며 주체도 왜가 아닌 백제로 보았습니다. 정복 시기는 신공기 49년(249)에 120년을 더한 근초고왕 24년(369)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신라와 가야 7국에 대한 백제 병합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백제의 영산강 유역 마지막 마한 4세기 병합설은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지만 오늘날 현대 다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백제가 영산강 유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마한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압했던 것은 동성왕을 이은 무령왕(재위 501~523)과 성왕(재위 523~554)대에 보는 시각이 있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은 아마 무언가 의도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요. 당시 신라와 왜의 관계는 친밀하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668년 이후 730년대까지 신라와 일본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에 나당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고 신라 입장에서는 뒷문을 단속하는 차원에서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도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백강전투의 패배와 국내문제로 인해 중단되었던 견당사도 702년이 되어서야 재개됩니다. 이즈음 일본의 율령체계는 자리잡아갔으며 고대천황제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율령의 편찬과 함께 천황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역사서의 편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체제를 확립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를 수록한 『일본서기』의 편찬이었을 것입니다. 이전 편찬된 『고사기』가 이러한 천황지배체제확립에 힘을 실어주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편찬에는 수많은 한반도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니 이에 대한 기록들은 분명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백제계 귀족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의 넣어 그 땅을 대신 차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번국(蕃國)으로 여기고 있는 신라에 대한 자적개심을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668년 이후 730년대까지의 신라와 왜의 관계는 겉으로는 우호적이지만 사실은 사신들의 왕래를 통해 상대를 정탐해야 하는 긴장관계였고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의 용왕이 되어 왜의 침입에 대해 대비하려 한다는 것은 당시의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대외관계를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임나일본부설의 근원지 중의 하나로 백제계 망명귀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백제계 귀족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여 천황과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가져갈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백제의 재건입니다. 그들은 일본천황과의 관계를 통해 백제계 귀족들이 갖지 못한 군사력의 도움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백제 부흥이 꿈이 아닌 것이 고구려가 망하고 나서 그 자리에 발해가 세워집니다. 이러한 대외적인 상황 또한 백제 재건의 꿈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목적은 과거에 우리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었다가 아닌 신라의 정벌이 좀 더 본질적인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731년 병선을 동원해 신라의 연안을 침입하여 실현시키려 했습니다. 또한 임나일본부라고 주장되는 곳은 왜가 교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라 아예 연관이 없는 지역도 아니었고 일찌감치 멸망한 지역이라 그에 대한 역사기록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것도 백제계 귀족들이 타겟으로 삼기에도 적당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도 당시 상황을 미루어본 추측입니다. 그리고 역사서에 대한 허위기록으로 인해 임나일본부는 그 논란만 낳은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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