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성장과 배경
2023. 7. 10. 19:4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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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가야연맹체(加耶聯盟體)의 한 나라로서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이었다고 합니다. 대가야는 그 중심지가 고령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멸망하면서 주민들과 정치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기전 1세기에 고령지방에 정치체가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치집단에 속단할 수는 없는데요. 반운리 고분군에서 2~4세기의 와질 토기가 보고되었고 고분군에 대해서는 삼한시대와 대가야시대 및 그 직후의 주민들이 묻힌 고분군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정치체의 등장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료들로 미루어볼 때 변한에 소속된 미오야마국이나 반로국이 고령에 위치했던 읍락국가로 추정할 따름이며 현대에는 미오야마국보다는 반로국(半路國)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 있었던 가야가 반파국이라고 지목되고 있는데 반의 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반파가 곧 반로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한 글자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반로가 곧 반파이고 대가야라는 것은 억지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3세기에 영남지방은 크게 변한과 진한으로 나뉘었고 고령은 이 중 변한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측 사서기록에 따르면 변한과 진한은 훗날 가야와 신라로 성장하여 수장의 칭호를 간지(干支)를 사용한다거나 행정거점에 모라(牟羅)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진한의 중심세력은 이주민이라는 중국측 사서기록이 있는데 반해 변한은 그렇지 않으므로 토착계가 중심세력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변한과 진한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제사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조상세계가 달랐던 것은 아니냐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변한 세력의 중심체로 구야국이 떠오르는데요. 삼한은 정치적으로 느슨한 정치체였습니다. 구성 읍락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낸 국명을 유지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들은 함께 했을 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리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와 교역할 때에 이런 편이 유리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무역창구인 강을 끼고 있는 나라가 이러한 정치체의 주도권을 갖게 되고 낙동강 어귀에 있던 구야국이 변한, 사로가 진한의 맹주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변한과 진한이라는 그 성격이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공동체로서 더 진하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연맹체를 버티게 하는 힘이 바뀌면서 변한은 가야로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삼한에게 있어 선진문물의 유입창구는 대방과 낙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270년부터 직접 본토로 나아가는 삼한이었는데 이러한 교섭은 20여 년 만에 중단되고 맙니다. 그러한 요인에는 중국 내부의 혼란, 즉 내란과 5호(胡)의 중원 진출이 가시화되면서 단절되고 말았는데요. 그런데 이 시기에 진한과 마한은 중국의 교섭상대로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변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 변한의 중심세력에게는 변화보다는 구질서가 오히려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13년에서 314년에 고구려에 의해 낙랑과 대방이 소멸되면서 그러한 교역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문물과 기능을 가진 집단이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이러한 정치집단 혹은 문화집단이 이동해 왔다면 삼한사회는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가령 4세기 이후에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명칭 대신 백제, 신라, 가야라는 국명이 등장한다는 점, 읍락국가의 국명 변화 혹은 새로운 국명이 출현한다는 점, 그리고 4세기에 들어 새로운 주장의 칭호로 간지(干支) 혹은 한지(旱支?)등이 사용된다는 점은 변한이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4세기 중반 쯤 되면 변한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그들 간에 우열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세기 초의 광개토대왕비나 『남제서』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남가라와 가라가 등장하는데 가라는 본래 3세기 구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4세기 언제부턴가 구야가 가라로 바뀌고 그것을 가리킨 지명도 김해에서 고령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김해는 남가라가 되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정치적 변동이 함께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4세기 초에 있었던 정치적 변동, 즉 고령에 있는 세력이 성장하여 구야에 기원을 둔 가라란 명칭을 가져갈 수준까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가야 연맹체지역이던 창녕의 불사국은 삼한시대에 진한에 속해 있었으니 이는 곧 변한이 곧 가야로, 진한이 곧 신라로 나아갔다는 역사상식을 깨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한에서 가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변화가 뒤따랐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세기 초만 하더라도 가장 힘이 센 수장의 호칭인 신지를 사용한 것은 안야와 구야뿐이었습니다. 이 둘은 바다로 나아가는 교통의 자리했는데요. 그런데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지명과 관련하여 비정하는 데 곤란함을 겪고 있으나 대부분 내륙에 있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낙동강 본류를 끼거나 지류로 돌아가는 자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정치세력의 판도가 남해안에서 내륙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김해를 근거지로 한 구야국의 약화로 볼 수 있는데요. 3세기말 변화 속에서 유독 변한만이 중국본토와 교섭을 나서지 않았고 그 중심에는 구야국이 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철이 최대 재화로 각광받던 시절 김해는 집산지이자 교역의 중계지로 기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굳이 수로교통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금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김해가 차지하는 위치도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륙지방에서는 제철기술과 함께 철기 제작기술까지 보유하게 되니 대가야의 철 생산을 짐작할 수 있는 야로를 보유한 가라가 대가야로 불리게 된 것도 이와 관련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철광산지만큼 기술력도 필요한데 낙랑과 대방의 소멸로 인해 유입된 유이민 중에 선진기술력을 보유한 세력이 가라로 왔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가야(가라)가 절대 강자는 아니었는데요. 그러던 차에 369년 백제의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대가야도 백제의 간섭 하에 놓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선진문물을 유입하는 창구로 여기면서 내실을 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요. 382년 가라가 함락당하며 국왕 기본한기를 비롯한 핵심세력이 백제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라는 거의 패망 직전에 놓인 셈인데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신라의 침략이었을 것이며 이를 구원해준 것은 백제였습니다. 이후 가라가 백제에 대해 예속정도가 심해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러한 것은 나중에 399년 가야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곤경에 빠뜨리니 그 배후에 백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광개토대왕이 남정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금관국이 쇠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종발성 함락만을 전하고 있으므로 아마 고구려는 신라 땅에서 가야와 왜 세력을 몰아내는 것에 그 의미를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일로 인해 신라는 더욱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었지만 언제나 이를 벗어날 기회를 찾고 있었고 그러한 것은 백제의 간섭을 받고 있던 가야도 마차가지였습니다. 그리고 479년 가라국왕 하지가 남제와 통교를 추진한 것은 그 예입니다. 이는 대가야가 5세기 후반 국제무대에 나올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전보다 여타 가야세력들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우위에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다른 가야와 연합하여 진행한 것이 아닌 단독으로 행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백제의 역할도 없었습니다. 당시 백제는 475년에 왕도가 고구려에 함락당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므로 대가야의 행보는 백제의 간섭이 약해지는 시점을 기다린 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독자의 길을 가려고 했던 대가야였지만 그 옆에는 여전히 백제와 신라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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