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가라 그리고 임나
2023. 7. 11. 19:4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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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가 다 그렇지만 가야 역시 많은 비밀을 간직한 나라입니다. 가야라는 국명도 마찬가지인데요. 가야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첫 번째는 가나(駕那)설로 끝이 뾰족한 관책(冠幘)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두 번째는 평야설로 남방 잠어주5에서 개간한 평야를 뜻하는 말인 가라(Kala)에서 왔다는 설, 세 번째는 간나라설로 ‘신의 나라[神國]’, 또는 ‘큰 나라’의 뜻이라는 설, 네번째는 갓나라설로 가야가 한반도 남단의 해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갓나라[邊國]’로 불렸다는 설, 다섯 번째는 가람설로 가야 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었으므로, 가야는 ‘ᄀᆞᄅᆞᆷ[江]’ 또는 ‘가ᄅᆞ=갈래[分岐]’의 뜻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여섯번째는 겨레설로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입니다. 그 근원은 알타이어의 ‘사라(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re) 〉 겨레(Kyeore)로 음운이 변천하였다는 설입니다. 일곱번째는 성읍설로 가야는 곧 ‘ᄀᆞᄅᆞ[大, 長의 뜻]’이며, 그 어원은 ‘성읍(城邑)’의 뜻을 가진 ‘구루(溝婁)’라는 설 등의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한편 국내의 한 학자는 가야를 불교와 관련지어 설명했습니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가 건무18년 임인년(서기 42년), 9간(九干)에 의해 왕으로 추대돼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가야’로 칭했는데요. 수로왕이 국호를 ‘가야’로 정한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지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야’라는 국명은 인도의 부다(Buddha·기원전 624~544)라는 성인이 진리를 터득한 장소인 ‘가야’라는 지명과 ‘깨달은 사람’을 상징하는 ‘부다’가 합쳐진 ‘부다가야’가 되었고, 이후 ‘가야’로 압축돼 국명으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 2년(서기 43년) 정월에 "짐이 도읍을 정하려 한다"고 말한 후 임시궁궐에서 남쪽인 신탑평(지금의 김해읍)으로 행차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지형은 여뀌잎처럼 협소하나 주변이 수려하여 16나한이 머물 수 있는 곳이다. 하물며 1이 3을 이루고 3이 7을 이룬다. 칠성주가 안주할 곳이니 도읍지로 가장 적합한 곳이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16라한은 불교의 16아라한 성자를 뜻하며 7성주는 7불을 의미하는데요. 가락국기에 기록된 김수로 왕의 언행을 보면, 그는 당시 이역만리 인도에 존재했던 불교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16나한', '7성주' 모두 당시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하면서 다불 신앙이 일어난 상황과 관련이 깊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을 뜨게 한 장소인 가야를 김수로가 건국이상으로 삼으면서 국호로 정한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또한 왕이 공식적으로 불교와 관련 있는 '가야'를 국호로 결정한 때를 불교를 전래 시기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가야라는 명칭을 불교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은 여러모로 파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고고학적 증거와 더불어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요. 고증없이 설화의 유래를 유추하여 불교 전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곤란할 수밖에 없으며 설화 자체가 불교적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다른 가야'의 어원은 '가라'입니다. '가라'는 '강가나 산자락의 마을'을 뜻하는 우리의 옛말로 '가야'의 다른 표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경북 고령의 대가야 왕 하지는 서기 479년에 중국 양쯔강 하구의 남제까지 사신을 보내 자신을 '가라국왕'이라 소개했습니다. 경남 김해의 가야국 왕 수로는 나라를 세워 '가라의 나라'란 뜻으로 '가락국'이라 불렀습니다. 고려시대인 1076년, 요즘 김해시장 격인 금관주·지사는 가야의 역사를 '가락국기'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가라'는 '가야'의 어원이었고, 가야인들 스스로 주장했던 국명이었으며, '삼국사기·삼국유사·일본서기' 등에 '가야'의 다른 표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야를 부르는 명칭이 가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가라가 있으며 임나도 있습니다. ‘가라(加羅)’는 옛말에서 산, 들 등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산기슭이나 들판의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임나가라가 등장하고 『일본서기』, 『남제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가라라는 표현은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고 있어 가야 전체로 인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나라는 표현도 있어「광개토대왕비문」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요.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에는 '임나왕족', 『삼국사기』 열전 강수열전에서는 '임나가량'이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문」의 ‘임나왕족’이란 표현은 진경대사의 조상에 대한 설명에서 등장하며, 그는 김유신의 후손이므로 여기서 임나란 금관가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강수열전의 '임나가량'이란 표현의 뒤에는 인(人)자가 붙어 있습니다. 가량은 가라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며, 강수가 왕에게 자신의 출신을 이야기하는 내용 중에 등장하므로 하나의 나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록에 보이는 임나가량을 금관가야로 보기도 하고 대가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 임나‘가 유독 『일본서기』에 많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임나’는 임의 나라라는 의미로 ‘임’ 또는 ‘님’을 표기한 임(任)에 나라를 의미하는 ‘나(那)’를 결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 당시 사용한 표현은 ‘가야’일까. ‘가라’일까. 우리 측의 문헌에서는 ‘가라’도 있지만 주류를 이루는 것은 ‘가야’라고 합니다. 한편 우리 쪽보다 편찬시기가 빠른 외국문헌을 보자면 기록이 가장 이른 『삼국지』를 제외하고는 ‘가라’라고 씁니다. 그러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본래의 표현은 ‘가라’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야’와 ‘가라’, 단지 표기상의 문제로 끝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신라의 경우 본래 사로라는 국명을 사용하였고 이후 ‘사로’와 ‘신라’를 같이 사용하다가 신라로 확정한 것에는 신라 정치권과 지배영역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라’와 ‘가라’ 둘 다 '라'라는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가라’라는 국명이 사용된 것은 4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라’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두 국가로 바로 대가야와 금관가야입니다. 그런데 4세기 『일본서기』에서는 고령을 가라, 김해를 남가라라고 표기합니다. 결국 김해와 고령의 가라라는 명칭을 둔 싸움에서 주도권을 가진 것은 고령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가라라는 명칭은 비단 고령만이 가지는 국명은 아니지만 김해를 남가라라고 한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정치세력을 포함하는 단어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데 가라라고 칭한 두 세력이 금관과 반파란 본래의 국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라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용어가 바로 ‘임나’입니다. 임나가 최초 등장하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종발성(從拔城)이라는 성 이름 앞에 ‘임나가라’라고 했으니 이는 국명이요, ‘임나’만이 단일 국명이 아닙니다. 『일본서기』를 미루어볼 때 임나는 대부분의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지 소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반면 임나가라는 어느 특정국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럼 왜 유독 『일본서기』에서 ‘임나’란 표현이 많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임나부흥회의는 6세기경 임나 지역의 세력을 재건하기 위하여 개최된 회의로 백제의 성왕이 주도하였습니다. 이는 신라에 의해서 멸망된 남가라 등 3국의 부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가야 여러 세력의 결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백제가 주도하며 하나된 가야를 지향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백제입장에서 하나된 가야를 지향하는 정치체가 바로 임나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임나’를 뒤에서 지원한 것이 바로 백제입니다. 따라서 백제와 관계가 깊었던 『일본서기』가 임나 관계 사료가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인데요. 고대사에서 임나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든 간에 ‘임나’가 ‘임나일본부설’과 맞물리며 현대에서는 그 이미지가 개운치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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