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 고분의 유물은 무엇을 말하는가

2023. 7. 13. 19: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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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고분군 전경

대성동 고분군은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3~5세기 무렵 금관가야(金官伽倻)시대의 여러 무덤 유적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학계를 놀라게 할 만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요. 88호분에서 출토된 파형토기는 국내에서 대성동고분에서만 발견된 것이었고 용문양의 화려한 금동허리띠.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말장식은 한반도에서 5세기에 이르러 금동제품이 출현한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은 말을 타고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91호분에서 발견되는 종 모양의 금동방울과 말을 제어하는 재갈은 말과 관련된 것인데요. 바로 북방유목민족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확인되는 순장 역시 북방유목민족의 습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야의 경우 3세기말부터 250년 정도 유행한 것입니다. 91호분에서 발견된 사슴뿔장식의 유목민들의 의식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가야의 건국자들은 북방문화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선비족 유물과 많이 흡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손은 선비족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또한 토기에 대해서도 주목할만합니다. 신라 가야 토기로 불리는 도질토기의 출현인데 이 토기는 섭씨 1200℃ 전후의 높은 온도에서 구운 환원염 소성의 단단한 토기를 말합니다. 도질토기 출현하기 이전의 삼한시대의 토기는 섭씨 7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구운 환원형 소성의 와질토기입니다. 그리고 이 도질토기가 김해와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여 영남지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들어진 도질토기는 두귀 달린 항아리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토기는 중국북방에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입니다. 가야에서 출현한 도질토기는 이전부터 제작되고 있던 와질토기를 바탕으로 북방토기가 결합된 것입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서 발견된 108호 목곽묘의 인골출토 양상 모식도.

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북방관련유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철제의 갑옷과 투구, 기마용의 말갖춤이 나오고 있는데요. 재래의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갑옷이 모델인 영남 특유의 철제갑옷과 더불어 북방유목민족의 독특한 기마용 갑주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철제갑옷의 출토가 북방유민민족에서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인데요. 이 기마용 말갖춤의 등장은 이전시기의 보병전의 전투형태에서 기병전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낙동강 하류도 군대와 더불어 전쟁의 시기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유물입니다.
한편 이 대성동고분군에서 춭토된 유물들과 비슷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국의 라마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선비족의 무덤은 거꾸로 된 사다리꼴을 하고 있는데 라마동 무덤은 직사각형형태로 대성동고분과 그 형태가 같습니다. 그리고 라마동무덤은 목곽묘 형식으로 이것도 대성동고분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선비족의 말안장은 사각형인데 라마동에서 발견된 것은 타원형이며 대성동에서 발견된 말안장도 타원형입니다. 따라서 김해 대성동 고분은 라마동 유적과 같은 계열이지만 이는 곧 선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대신 중국의 한 학자는 라마동 묘지의 주체 집단이 부여인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라마동에 순장된 인골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부연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2세기에는 동북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한 부여는 3세기 단계에서 사방 2천여리의 영역에 8만호, 4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대국이 된 부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나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3세기말부터 그 세력이 약해진 부여는 4세기 초에는 선비족의 나라인 전연과 고구려의 견제를 받으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346년 선비족이 부여를 쳐서 5만 여명을 끌고 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라마동은 당시 포로가 된 부여인의 묘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전연이 침공하였을 때에 일부는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른 일족은 탈출한 가능성도 있는데요. 그러니까 346년 부여족의 일파가 대성동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야의 지배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자 가능성입니다. 

김해 대성동고분 파형동기

정말 북방유물 혹은 부여족이 3세기말에서 4세기초 김해지역에 유입되었을까.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묘제의 변화입니다. 영남지방에는 2세기 후반에 덧널무덤이 등장했으며 3세기말 ~4세기 초에 덧널무덤에 변화를 보였습니다. 2세기 후반에서 3세기후반까지 폭과 길이의 비율이 2:3 정도 되는 덧널무덤이었는데 3세기말에 들어서면서 부산과 김해는 이러한 폭넓은 덧널무덤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경주를 포함한 신라지역에서는 1:3~5되는 폭이 좁은 덧널무덤을 축조한 것입니다. 한편 낙동강 하류의 덧널무덤도 이 무렵부터 순장의 흔적이라든가 부장품을 후하게 넣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요. 공동의 묘제로 사용되었던 덧널무덤이 분화된 데 이어 덧널무덤 안에 넣는 내용과 흔적에 있어서도 이전 시기와 차이를 보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장이라든가 후하게 부장품을 넣으면서 이전시기의 무덤마저 파괴하는 경향을 보였는데요. 북방문물과 습속이 무덤 안에서 나타나는 시기와 맞물리며 이전 시기의 무덤에 대한 파괴현상은 북방문물과 관련된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러한 문화가 전파된 데에 따른 양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다른 지역을 거치지 않고 낙동강 하류에 먼저 출현했다는 것은 전파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진서』 「동이열전, 부여국조」에서는 이를 유추할 만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태강 6년(285)에 모용외에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의 왕 의려가 자살학\하고 그의 자제들이 옥저로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무제는 도망간 부여왕의 후손들이 나라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인데요. 부여후왕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나라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며 옥저에 들어왔다가 동해안 루트를 따라 남하하여 낙동강 하류에 정착했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리고 가야 역사의 기록은 212년부터 481년까지 공백기로 남아있는데요. 옛 가야지역의 발굴도 5세기 대에 몰려있어 4세기에 있었던 가야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부여족남하설은 이러한 역사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여족남하설에 대해서 한국판 기마민족설이라는 비판을 받는데요.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설’은 4세기경 퉁구스 계통의 기마민족들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통과하여 일본의 규슈를 거쳐 동진하여 기존의 일본열도에 있던 정치세력을 정복하여 야마토(大和) 정권을 세웠으며 그 우두머리가 바로 천황가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 설은 북방의 유목전사가 세운 일본의 야마토국은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고, 따라서 한반도 남부를 정복할 수 있는 국력이었다는 논리입니다. 그에 따라 기마민족설은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이 여전히 한반도남부를 진행했다고 보지만 부여족남하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편 88호분에서는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소용돌이 모양을 한 파형동기입니다. 이것에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성동고분군에서만 확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88호분에서만 수습된 것은 총 12점으로 이는 일본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양보다 많은 양입니다. 이 파형동기는 고대 일본의 천황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방패장식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김해 대성동 세력이 일본과 활발히 교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야의 철제기술이 일본에 수출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김해시에서는 배편이 출토되었는데 이 배로 원양항해도 했을 것이며 과거에 가야가 중국이나 일본과 함께 대외교류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귀한 파형동기가 김해대성동고분에서 발견된 것은 선진문물의 창구가 되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보여준 왜의 답례품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요. 출토되는 유물들도 김해대성동 고분의 유물이 왜보다 선진적인 점은 부여족남하설이 한국판 기마민족설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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