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혹은 가락국의 흥망
2023. 7. 12. 19:3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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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하면 여러 국가들의 연맹체로 이해하지만 그 나라에 속한 나라의 도시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가야하면 떠오르는 도시가 바로 김해일 것입니다. 김해는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은 금관가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후손입니다. 김유신 뿐만이 아닙니다. 구형왕의 아들로 금관가야가 망하기 직전까지 왕자였던 김무력(金武力·518~579)은 진흥왕 때의 명장 이사부(異斯夫)의 부장(副長)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구형왕의 손자이자 김무력의 아들이 김서현(金舒玄·564년~?)은 김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인 양주(良州)의 총관이 되었습니다. 자연 백제와의 싸움이 잦았던 시절에는 여러 차례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 김유신이 있으며 그의 아들 김원술은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외면을 받았지만 매소성 전투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장창과 쇠뇌로 당 이근행의 20만 대군 격파하는 공을 세웁니다. 금관가야 왕가의 후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도움을 주어서 그런지 가야의 역사 중에서도 금관가야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으며 남북국시대의 신라에서 김해에 금관소경이 설치된 것도 이 지역 출신자들의 활약에 따른 예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멸망직전까지 금관가야가 가야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령, 함안, 합천 등지에서 강력한 국가정치체를 암시하는 유물이 나왔고 그에 따라 적어도 5~6세기의 금관가야는 다른 가야를 압도하는 세력은 아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야하면 김해와 금관가야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삼한시대에 인근지역에 비해 선진적인 지역을 현재 그 유물을 남기고 있다는 것인데요. 범방패총과 수가리패총에서는 많은 조개류와 함께 돌도끼, 돌칼, 타제석기, 갈돌, 갈판, 숫돌, 토우, 빗살무늬토기, 낚시바늘 등이 출토되었고 범방패총의 맨 아래층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 어린아이의 인골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북정패총, 부원동패총, 농소리패총이 김해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전하고 있으며 그러한 배경에는 김해가 남해안과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북방민족의 종착지역할과 해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기착지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지리적 조건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게 된 김해에 구야국이 형성된 것은 철기문화의 발전과 보급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지리적 이점으로 외부세력과 빈번한 교섭을 가질 수 있었고 진한(辰韓)·변한의 철자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동예(東濊)·마한(馬韓)·왜(倭) 등과 철을 매개로 활발한 교역관계를 가지면서 한반도 초기철기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구야국의 형성시기를 추정하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한(韓)의 지역에 옮겨가 한왕이라 칭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요. 그 시기가 기원전194년이고 이 시기에 한(韓)지역에 국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구야국은 기원전 3세기초에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2세기 후반 구야국 국읍(國邑)의 주 고분군인 양동리고분군 중 가장 오래된 고분인 ‘양동리 162호분’은 대형 장방형 목곽묘(木槨墓)일뿐 아니라 유물에서도 한경 2매를 포함한 10매의 동경(銅鏡)과 수정다면옥, 유리구슬목걸이 등 수준 높은 위세품(威勢品)과 다량의 철정(鐵鋌), 철촉(鐵鏃), 철모(鐵矛) 등 철제무구, 재갈 등을 부장하고 있어 그 세력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더니 이 때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의 구간이 있어, 이들이 추장이 되어 백성을 거느리니 그 수가 무릇 1백호(1만호의 잘못으로 추정) 7만 4천인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산야에 도읍하여 우물을 파서 마시고 맡을 갈아 먹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의 김해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료기록입니다. 당시에는 가라국을 이끌던 수장들은 구간이었고 9개의 집단이 있던 것입니다.
‘일찍이 조선 유민이 산곡지간에 거처하여 6촌을 이루었다.’
이때의 조선유민은 한나라에게 망한 고조선의 백성을 의미하며 가락9촌을 통합한 수로왕은 선진적인 위만조선의 철기문화를 가진 고조선 유민의 한 일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에는 동북아시아 문화 및 문물 교류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구야한국을 언급하며 한군현인 대방에서 왜로 가는 첫 번째 경유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해에는 일명 왕망전이라고 하는 화천(貨泉)도 출토되었는데 신나라의 왕망에 의해 기원후 14년에 만들어져 10년 정도 유통된 화폐입니다. 이 동전은 중국의 군현으로부터 김해의 구야국을 거쳐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발견되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유통된 동전이 김해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구야국을 통한 문물교류가 빈번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며 이뿐만이 아니라 중국식 청동거울과 왜계의 문물이 나오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이 구야국에 당시 인구가 집중된 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김해평야가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김해평야 일대는 바다였다고 합니다. 결국 김해에 구야국이 형성될 수 있던 것은 자연조건과 풍부한 철자원 그리고 선진문물 교역을 통한 경제력 습득으로 볼 수 있으며 3세기 중반 이후로 구야국은 변한사회에 있어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곳을 발굴한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된 것입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정치집단으로서의 성장한 가락국의 위상을 알려주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수준은 같은 시기의 백제나 신라와 비교하여도 결코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신라에 비해서는 우수하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점으로 인해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락국은 가야사의 시작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가락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그 명칭을 전하고 있는데요. 구야국, 가야국, 임나국, 금관국, 금관가야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락국이 남해안과 낙동강을 끼고 있다는 교통의 요지를 발판으로 중개무역으로 흥할 수 있었습니다.
구야국은 정치적 지배자인 신지(臣智)에게 ‘구야진지렴(狗耶秦支廉)’이라는 우호(優號)를 부여해줄 정도로 유력한 소국이었으며, 4세기까지는 낙동강하류 및 남해안지역의 일부 소국들을 통솔하는 하가야(下伽耶)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는 『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婆娑王) 23년(102년)조에 실려 있는 신라와 수로왕의 일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영토분쟁 해결을 위해 수로왕을 초빙한 사례인데요. 게다가 수로는 자신에 대한 접대에 부당한 대우를 한 한기부(漢祗部)의 수장인 보제(保齊)를 죽이고 자국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구약구은 초기고대국가시기에 사로국(斯盧國)에 비해 위상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미천왕 14년(313)과 15년에 서북한에 잇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면서 가락국은 선진문물의 유입이 차단되었습니다. 주변국에 대하여 선진문물을 재분배하는 가락국의 부의 축적방법이 막힌 상태에서 제철기술 또한 보편화되면서 철의 왕국으로서의 가락국의 위상은 예전같지 않았으며 농업생산도 활발하지 않았던 탓에 이를 통한 부 축적도 힘들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고구려의 군대가 가야로 진출한 이후 이 지역에서 대형고분군도 사라졌으며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진흥왕의 신라에게 가락국이 마지막왕인 구형왕이 투항함으로써 가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자진투항으로 인해 가락국왕은 식읍을 신라로부터 받을 수 있었고 그의 후손들은 신라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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