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맹이라는 말이 불러올 가야에 대한 오해
2023. 7. 9. 20:1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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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 대해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는 금관가야로, 후기가야 연맹의 중심은 대가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야연맹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잦은 공격을 받았는데 금관가야의 멸망을 시작으로 하나 둘 신라에 병합되면서 562년 완전히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가야는 여러 개의 나라가 모인 연맹왕국으로 보고 있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런 전기가야의 중심국가로 여겨지는 국가는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구야국(금관가야)으로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철산지를 이용하여 전기가야의 맹주로 자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4세기말 5세기 초의 고구려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그 중심세력이 신라에 흡수되거나 흩어짐에 따라 전기가야연맹은 해체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내륙지역으로 비교적 타격을 입지 않은 대가야가 선진문물과 집단을 받아들여 후기가야의 연맹을 주도하였다고 하는데요. 결국 이런 것을 본다면 가야는 전기가 되었든 후기가 되었든 연맹체를 이룬 나라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다른 의견이 존재합니다. 가야가 연맹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1개의 연맹체가 아닌 2개의 연맹체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니까 고령의 반파를 바탕을 일정한 영역을 가진 대가야국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포섭된 대가야연맹과 남강을 경계로 하여 안라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가야연맹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제기될 수 있는 문제가 바로 함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안라, 즉 아라가야의 존재입니다. 금관가야와 대가야 못지않게 안라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과시한 것으로 이해하는데요. 안라의 영향권에서 발견되는 고총고분 규모는 고령의 대가야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가야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안라에까지 뻗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상 안라는 대가야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전기가야 이후 후기 가야를 단일연맹체로 이해하려 한다면 안라국의 존재 때문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보다 더욱 생각해 볼 문제는 바로 가야를 설명하는 연맹이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점입니다. 이수광과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처음 주장한 이후 이병도 교수가 근대적 학문 체계 속에서 정립한 '연맹 왕국설'이 오랜 기간 동안 정설로 여겨졌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가야 연맹'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외부에 공동 대응하는 연합체 정도로 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정설이 변경되고 있습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소국들이 연맹 형태로 연결된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이 지역에 속하는 서로 남남인 소국들을 총칭하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가야연맹 부정론을 말하기도 합니다. 가야들 중 이미 몇 개는 국가의 형태를 이루었고 이들이 서로 연맹을 이루었다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는 연맹이라는 것이 부족연맹이고 국가 성립 이전에 실재한 부족들의 연맹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연맹이라고 해서 이를 부족연맹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보다 진전된 소국 간의 연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이 가야연맹이라는 것이 국가 형성과정에서 발전단계로서 그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족국가 그 이후의 단계는 연맹왕국으로 보고 이후로는 고대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발전단계가 아닌 하나의 정치형태로 보기도 하는데요. 이러는 과정에서 앞서 견지했던 발전과정으로서의 연맹도 고려되었지만 이제는 정치형태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가야에 대해 이웃나라인 백제나 신라처럼 율령제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낙후된 상태에서 멸망하였다고 생각해도 되는지에 대한 재고도 필요합니다. 결국 후대인들이 가야에 대해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가야에 대한 역사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세기 후반 가라나 안라를 보면 이전보다 발전된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데요. 5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대(對)중국교섭에서 작호를 받았다는 사실이나 국명 가운데 신라처럼 라(羅)를 칭하는 국가가 보인다는 점, 6세기 초 남조의 양과 교섭할 때 백제를 매개로 했긴 했지만 가야의 유력세력이 신라와 함께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중국식의 왕호나 대왕(大王)를 사용한 점은 가야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각종 사료에서 가야에 대해 직접 연맹이라고 칭하고 있느냐하면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야연맹체의 근거가 된 것은 ‘6가야는 김수로와 그 형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설화이니만큼 이를 통해 가야연맹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400년 고구려 신라의 연합군대가 김해가야를 압박합니다. 그러면서 임나가라 본국 김해가야의 영향력이 와해되고 이로 인해 부산과 창녕 지역을 비롯한 낙동강 서편의 소국들은 벗어나게 되고 이즈음부터 연맹체는 해체상태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에서는 3세기에 김해가야는 함안 안라국과 함께 주변 지역을 가야권을 통합해나가고 있었고 지배적인 위치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를 연맹이나 연합으로 볼 수 잇느냐 하면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야연맹에 자꾸 집착하는 것은 바로 6가야에 대한 언급이고 『삼국유사』에서 ‘자주빛 끈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끝에 6개의 둥근 알이 있었는데 다섯은 각기 그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가락국)에 남았다. 하나는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금관가야가 그 다섯에 들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한 기록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6가야의 명칭도 가야시대에 있던 소국 명단 그대로가 아니라고 합니다. 가령 『삼국유사』에서는 5가야를 제시하면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상주 함창),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역시 『삼국유사』에서 지금은 전하지 않은 『본조사략』을 인용하며 ‘고려 태조 천복 5년(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면서 성산가야, 아라가야는 그대로 두고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를 새로 넣었다.’고 합니다. 만약 ○○가야의 명칭이 그대로 고려시대에 전해졌다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가야라는 것도 어쩌면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6가야 또는 5가야 형제설화도 신라말 가야권의 단결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탄생되었다는 의견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가야를 연맹왕국으로 보는 근거 중 하나인 김수로의 건국설화가 나중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 이유는 대가야가 가야를 통합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이거나 신라말기에 지어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하면 가야연맹은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만 이를 통해 신라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혹은 신라말에 나온 이야기이거나 김해가야가 나중에 5가야 혹은 6가야를 통합하였으므로 김수로 건국 설화의 탄생 배경이나 의도는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가야의 연맹을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지역연맹체론입니다. 이 주장은 전기가야가 김해가야를 중심으로 했다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5세기 이후에는 고령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는 5세기 이후 가야권의 정치중심이 함안과 고령, 그리고 그 외에 분산되었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설입니다. 다만 이 주장도 역시 맹주국의 부재와 기록된 군사동맹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입니다. 그렇더라도 가야가 멸망에 이를 때까지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력 우세한 세력을 중심으로 내부에서 계속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야를 연맹왕국으로 규정한다면 가야가 역동적으로 정치적으로 변화를 모색해왔다는 점은 간과될 수 있기 때문에 가야연맹이라는 역사적 용어에 대해 좀 더 확실한 연구와 성과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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