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성립시기와 영역은
2023. 7. 7. 20:1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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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야는 여전히 낯선 나라입니다. 고대사에 있는 여타 나라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일찍 멸망한 탓도 있고 후대에 이를 기록한 사료들이 적어서 동시대 국가들에 비해 가야는 풀어야할 비밀이 많은 나라입니다.
가야에 대한 것 중 분명한 것은 바로 멸망한 시점입니다. 가야가 멸망한 것은 562년입니다. 이것을 멸망으로 보든 소멸로 보든 가야란 고대국가가 역사상 없어졌다는 점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가야의 성립은 언제일까 하는 것은 수수께끼입니다.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로부터 멸망까지 10명인 거에 비해 국가의 존속기간은 500년이 넘습니다. 또한 시조인 김수로의 재위연수가 150년에 달한다는 점은 가야의 성립시기가 42년이라는 것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삼국유사』에 42년에 구야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므로 별 문제가 없다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것은 가야의 시작을 변한 12국과 관련 지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기원후 1세기에서 빠르면 기원전 1세기로 추정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 자료는 바로 목관묘와 와질토기의 출현을 그 근거로 삼습니다. 목관묘의 시작은 기원전 2세기 대에서 기원전 1세기로 보고 있으며 와질토기는 기원전 1세기 중엽부터 기원 1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문헌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문헌에서 기록하는 42년은 신화적 의미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재고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존재합니다. 이병도는 부족국가로서의 가야성립을 기워전 2세기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성립을 3세기로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가야의 시작을 4세기 초인 313년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구야국을 변한의 역사로 그 이후의 역사를 가야사로 설정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고구려가 남하하여 313년에는 대방군을, 314년에는 낙랑군을 소멸시킨 일이 있는데 이로 인해 삼한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정치변동에 의해 백제, 신라, 가야가 출현하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고고학적 자료인데요. 3세기 후반 등장한 삼한의 목관묘는 순장이나 말을 희생시키는 습속, 오르도스형 동복, 철도(鐵刀)를 구부려 부장했는데 이는 북방부여계의 특징으로 이전에 보였던 목곽묘가 낙랑계이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변한과 금관가야를 구분지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그 타당성에 대해 의구심을 지을 수 없지만 3세기말 4세기초의 변화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3세기 전반 『삼국지』에서는 삼한이 나타나고 『진서』에는 중국과 교류하는 세력으로 마한과 진한을 기록합니다, 이후 삼한에 대한 기록은 붕 뜨다가 광개토대왕비에서 4세기 후반에 백제, 신라, 가야, 임나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사이 새로운 정치적 집단의 출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그런 면에서 변한은 가야의 앞선 역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가야의 명칭의 기원이 되는 구야국이 3세기 초에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4세기 초 정치적 변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변한을 가야의 전기(前期)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 보면 삼한시대에 대한 재고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삼한이야 삼국 혹은 가야의 일부로 여겨지지만 그렇게 되면 과연 삼국시대 말고도 그 이전의 삼한시대의 설정이 얼마나 의미를 갖는지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삼한시대가 마한, 변한, 진한이 각각 백제, 가야, 신라로 나아갔다는 의식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는데 그러한 것이 과연 맞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변한과 진한은 그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사회적, 문화적 기반이 같았다고 합니다. 또한 3세기후반에서 4세기 사이에 소국의 명칭에서 변화를 보이고 시대적 의미인 삼한이 사라진다는 점, 그리고 삼한시기의 지배층인 신지, 읍차 등이 사라지고 대신 한기(旱岐)라는 명칭이 나타난다는 점은 가야의 성립이 과연 42년인가에 질문을 던집니다. 결과적으로 가야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후 300년 이후라고 잡는다면 그 간극은 500년이나 차이 나므로 가야의 성립시기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럼 가야의 영역, 즉 공간적 범위는 어디일까요. 만약 변한을 가야의 전기(前期)로 이해한다면 변한 12국의 공간은 곧 가야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기 가야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로 통해 보충해나간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변한이 곧 가야인가라는 점에 물음표가 달립니다. 이럴 경우 변한과 진한이 혼재되어있을 경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변한 12국을 가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위치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안야국, 구야 등을 포함한 4,5국 정도를 빼고는 나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럴 경우 가야의 영역은 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가야의 영역은 정확하게가 아닌 대략적으로 유동적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어져야 하며 그 경계는 낙동강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낙동강을 그 근거로 삼더라도 이것이 가야의 최전방인지 아니면 이 낙동강 유역을 다 가야에 포함해야하는지 고민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 어느 순간에는 이 낙동강 일대가 전부 가야의 세력권이었다가 혹은 가야와 신라의 교착점이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고학적인 자료입니다. 만약 고분을 근거로 하여 적석목관분이 발견된 지역을 신라로, 수혈식석관분을 가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적석목관분이 발견된 지역이 경주분지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 과연 가야의 영역으로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다른 고고학유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바로 토기입니다. 그러니까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로 구분하여 영역을 설정하자는 것인데 이는 고분보다는 보다 넓은 영역에 대해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럴 경우 낙동강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가야식으로 정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낙동강 유역은 가야의 영역이 됩니다. 그런데 이 방법에 있어서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를 구분하는 방법이 적절한지 의심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구분도 5세기 이후에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는 그 이전의 가야와 신라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고학적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영역을 정하려는 움직임도 생기는데요. 문화권과 정치적 설정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연 문화적인 양상을 과연 정치적인 영역으로 특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기며 그리고 이러한 영역이 과연 가야와 신라 대부분의 시기가 아닌 어느 특정시기를 반영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으나 현재 변한을 가아의 전기(前期)로 보고 변한이 존재했던 3세기까지를 전기가야, 400년 이후를 후기가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광개토왕의 남정을 계기로 가락국이 쇠퇴하고 내륙지역인 고령의 대가야가 성장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영의 영역을 비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륵의 12곡에 근거한 곳입니다. 문제는 12곡의 곡명의 위치가 학자들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서기』를 근거로 멸망당시 그 이전에 멸망당한 남가라, 탁기탄, 탁순을 제외한 나머지 10국을 살펴보는데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나 일치하는 곳을 중심으로 가야의 영역을 설정합니다. 그러다 보면 북으로는 성산가야가 잇던 성주, 자타국이 있던 거창, 서쪽으로는 상기물이 있던 임실읍, 하기물이 있던 남원, 남으로는 소가야의 고성, 독로국의 거제, 서쪽으로는 비화가야의 창녕, 미리미동국의 밀양에 이르는 영역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신라와 안라(함안)의 경계가 대강이라 하였으니 대강은 곧 낙동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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