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는 어떤 나라일까

2023. 7. 14. 07:2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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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안라국은 현재 함안 일대에 있던 가야입니다. 함안은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곳으로 그 흔적을 남겼는데요. 아라가야의 500년 수도였던 함안은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로, 북과 서는 낙동강과 남강이, 남과 동은 6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져 있는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구석기 유물 뿐 아니라 특히 청동기시대 고인돌, 선돌 등 거석 제단시설이 많아 경남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체를 이루던 안라국은 문헌에는 여러 국명을 되어 있으며 우리에게는 아라가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가락국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6가야의 왕은 모두 금합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씨로 하고 각기 도읍한 땅을 관향(貫鄕)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아라가야의 시조는 수로왕의 아래 동생인 아로왕(阿露王)이나 아로왕이 백제계 비류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안라국은 삼한시대 변진의 한 국가인 안야국이 성장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삼국지』에 따르면 4천~5천 호 정도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안야국은 가야 전 시대에 걸쳐 비교적 강한 힘을 발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원동력에는 농업생산력과 교역에 유리한 조건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평야와 더불어 남강, 낙동강의 배후 습지를 이용한 농경과 교통로로 활용된 강이 그것입니다. 이 외에도 철, 수산자원도 안야국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보고 있는데요. 고대 국가들의 초일류 기술인 ‘제련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철 생산이 필수였으며 안라국은 함안군 군북면 일대에 직접 철광과 동광을 운영하면서 제철 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현재 경남 함안 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복광산이 있고, 동광의 산출지로는 함안 광산과 군북광산이 있습니다. 특히 동광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안야국이 성장하여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안라국이 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시기는 변한에서 가야로 변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안라란 이름이 국제사회에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광개토대왕비문입니다.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재위 391∼413)의 치적 등을 담은 광개토왕릉비문에 새겨진 문구인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이 바로 그것인데요. '안라'를 나라 이름으로 보는 게 통설이나 술어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즉, '안(安)'을 '안치(安置)하다'라는 동사로 해석해 "신라인(羅人)을 배치하여 지키게(戍兵) 하였다"고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안라인이 수병하다'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안라·고구려 연합군 같은 형식으로 안라국과 고구려가 교감하고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김해 가락국 멸망의 결정타가 됐던 400년 광개토왕의 남정을 전후해 안라국과 고구려의 화친 관계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없는 상황입니다.

함안 말이산 4호분 출토 수레바퀴모양토기

이렇듯 서기 400년. 가야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야·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친히 5만 군사를 이끌고 남정을 떠났습니다. 당시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백제-왜-가야’ 연합군의 대립이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가락국은 국읍이었던 김해까지 함락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반면 안라국은 ‘백제-왜-가야’연합군의 일원으로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가락국 영토에서 펼쳐져 안라국은 피해는 한결 적었습니다.
이러한 안라국의 국력을 실감하려면 궁터를 보면 되는데요. 고대 아라가야의 왕궁이 있던 곳으로 추되던 곳은 함안 가야리 유적지입니다. 해당 지역은 경사지로 이루어져 있어 그저 야산으로 보이지만 왕궁의 성벽이 있던 곳인데요. 성벽으로 추정한 이유는 인위적으로 벽을 축조한 흔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가야인들은 이른바 '판축기법'을 써서 성벽을 만들었으며 일정한 틀을 만들어 안에 흙을 집어넣은 뒤 단단히 다져서 성벽을 만들었습니다. 사용한 흙도 한 가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흙으로 벽을 세웠는데 이는 튼튼한 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런 기법은 고대 중국의 성이나 백제 한성기의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확인되는 방식입니다. 이런 성벽이 둘레 2.4km에서 확인되는데 가야 권역에서 최대 규모로 남아 있는 성벽 가운데 가장 높은 게 9m에 이른다고 하며  신라의 월성, 백제의 부소산성 등과 대등한 규모입니다. 그만큼 아라가야의 국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연인원 16만 명 정도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아라가야는 생각보다 국력이 셌던 국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토기와 철기가 출토된 것을 비롯, 경 60cm에 깊이 80cm의 나무울타리인 목책 지역도 100m 구간이 확인되었으며 건물지와 부뚜막 시설의 흔적도 확인되었고 성 바깥 인근 지역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니 이곳은 토기와 철기가 유통되던 요충지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아라가야는 고대국가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다만 율령이나 불교를 수용하지 못한 것은 대가야나 아라가야가 더 발전된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강력했던 아라가야의 흔적을 현재 전해지고 있는데요.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안라국 지배층의 묘역으로 도항리 고분군과 말이산 고분군을 통합·관리하다가 최근 남문외 고분까지 사적으로 통합되면서 현재 고령 지산동 고분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고분군이 되었습니다.

말이산고분군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

 남제(南齊)의 견사 기사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에서 ‘가라왕’, ‘안라왕’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의 왕에 해당하는 최상위계층의 중심묘역이 말이산 고분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함안 주변의 오곡리 유적, 의령 예둔리, 마산 현동 유적에서도 최상위 계층의 고분이 축조된다는 점은 아라가야의 위계와 사회문화 전반이 신라와 백제와 같은 완전한 고대국가체제까지는 아니지만 일정한 수준의 고대국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함안천과 광정천에 둘러싸인 해발 50m 정도의 낮은 구릉 능선의 정선부를 따라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127기의 큰 무덤들이 나란히 한 말이산 고분군은 1587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강점기 1918년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도굴식 발굴이 있은 후 정식보고하지 않고 사진과 도면 몇 장만 남기는 등 일제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채 100년 동안 지하에 방치돼 있었습니다. 1917년 말이산 4호분과 25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해방 후 1963년 1월에 함안 도항리 고분군과 함안 말산리 고분군이 각각 사적 제84호와 사적 제8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후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학술조사는 주로 1990년대에 들어와서 정밀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말이산 고분군은 아라가야 최전성기인 5세기 후반 최고지배층 묘의 고고학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문화고분군에 속하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이산 75호분에서는 5세기 무렵 중국 남조(南朝)에서 제작된 연꽃무늬 청자그릇 1점이 출토됐으며, 그 주변에서는 일반적으로 '로만글라스'라 칭하는 둥글게 말린 장식이 달린 감청색 유리 조각이 나왔습니다. 이와 함께 2022년 말이산고분군 북쪽지역 시굴조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리 조각이 1점 출토되었습니다. 함안 말이산고분군 출토 유리 조각 2점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유리 조각 각 1점에 대한 분석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4점의 유리 조각은 칼슘(라임)의 함량이 높고 알루미나 함량이 낮아 로만글라스라 부르는 소다-라임 유리로 확인되었습니다,  로만글라스 형태의 유리 용기 조각이 함안, 김해 등 영남권역에서만 발견되는 점을 볼 때, 제작지와 제작 원료가 다양한 로만글라스가 고대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라가야 문화권에서 로만글라스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로만글라스의 출토로 가야문화권에서는 3번째로 이러한 출토로 역사 속의 새로운 아라가야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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