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가야 내 강국 아라가야
2023. 7. 15. 07:2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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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는 변한시기에 안야국으로, 가야후기에 안라국으로 불리던 6가야 중 하나입니다. 아라가야, 아야가야라고도 하지만 ‘가야’가 뒤에 붙은 이름은 가야가 존재했던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야가 존재했던 시기의 이름은 안야와 안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가야라 하면 연맹체국가로 그 시기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한데요. 전기에는 금관가야, 후기에는 대가야가 연맹체를 이끌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라가야도 나름 힘을 과시한 국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금관가야는 전기에, 대가야는 후기에 집중되고 있는데 반해 아라가야는 전기에는 변진안야국으로 중국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진 집단이고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이름이 나와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그 이름이 6세기 대에도 꾸준히 언급되고 있어 아라가야는 전기와 후기를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강력한 힘을 과시한 정치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야국의 형성시기를 기원전 1세기로 잡고 있는데 이 시기에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는 다른 목관묘가 등장하기 때문이고 김해의 구야국과 함께 힘이 강한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야국이 급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포상팔국 전쟁으로 이 전쟁은 해상 교역 거점으로 포구를 지닌 고성 사천 마산 일대 8개 나라가 연합해 금관가야(또는 아라가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가야사 세력권이 충돌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라가야가 포상팔국을 제압했다는 설을 비롯해 여러 이론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을 통해 4세기 아라가야가 급팽창했다는 것입니다.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로는 아라가야 양식 토기(돗자리문양 항아리 등)가 4세기에 ‘대단히’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입니다. 부산 경남 전남(여수 순천) 일대는 물론이고, 신라권역(경주 대구 포항) 백제권역(공주 천안 청주) 등과 함께 서일본 전역에서 아라가야 토기가 발굴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일본에 아라가야 도공이 파견됐을 정도라는 견해도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4세기 아라가야는 강(남강 낙동강)과 바다를 통해서 국제적 ‘경제’ 교역망을 장악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습니다. 경제적,문화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4세기 아라가야 ‘정치적’ 세력권은 ‘중심지 함안’에만 한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분군이 발굴된 곳은 총 8곳으로, 남강 건너편 의령뿐 아니라 특히 산 너머 660여 기의 목곽묘가 대량 발굴된 창원 마산합포구 현동도 아라가야 토기가 일색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현동 덕동만과 그 서쪽의 진동만은 4세기 후반 아라가야 주요 교역항으로 추정됩니다.
서기 400년. 가야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합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야·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친히 5만 군사를 이끌고 남정을 진행한 것입니다. 당시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백제-왜-가야’ 연합군의 대립이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가락국은 국읍이었던 김해까지 함락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반면 안라국은 ‘백제-왜-가야’연합군의 일원으로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가락국 영토에서 펼쳐져 안라국은 전쟁의 피해가 적었습니다. 안라국 국읍을 비롯한 중심부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지 않은 것은 안라국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구려 남정 이후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가락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안라국과 반파국이 새로이 맹주국의 역할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아라가야가 이 전쟁에서 고구려,신라와 연합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을 해나갔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5세기에 만들어진 말이산 고분군이며 여기에 더해 함안의 전형적인 토기유형인 화염문투창토기의 분포가 더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라가야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된 ‘안라인수병’은 아라가야가 고구려-신라연합군의 편에 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칠원지역이나 의령의 남부지역 그리고 창원진동의 일부가 아라가야에 흡수된 것으로 이 시기에 정치적 발전이 수반되며 아라가야는 최고지배자의 명칭은 왕을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가야 소국은 고대국가 이전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평가하지만 아라가야는 사정이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서기의 고당회의 관련기록을 보면 국주는 아라가야왕을 가리키는 것이며 국내 대인은 국주 다음으로 언급되어 아라가야 내 다음가는 정치인으로 볼 때 대인은 아라가야왕권에 복속된 집단으로 아라가야는 국왕을 중심으로 대인과 한기들의 합의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안라국의 영역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5세기 함안지역 대표 토기인 불꽃무늬토기는 안라국 권역을 알수 있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이 토기는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 칠원면 오곡리 유적, 창원 현동·도계동 유적, 의령 예둔리 유적·유곡리 고분군·봉두리 고분군·진북 대평리 고분군, 진주시 진양 압사리 고분군 등입니다. 또 불꽃무늬 토기의 분포지역을 통해 안라국의 최대 영역은 함안을 중심으로 서쪽 진주시 일부지역, 북동쪽 창원시 일부 지역, 서북쪽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 창원 마산 합포구 진동지역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불꽃무늬 토기는 아라가야 영역 외에도 김해, 부산 합천 창녕, 울산, 경주, 김천 등 가야 신라문화권인 영남지역과 고대 일본의 중심지였던 긴키近畿지역(옛날 기나이에 가까운 지방이라는 뜻)에서 출토되어 1,500년 전 아라가야의 대외교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가 가야의 소국이니만큼 철로서 번영을 누렸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를 증명하는 유물이 바로 마갑총입니다. 1992년 6월 6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에서 아파트를 짓고 배수로 설치공사를 벌였습니다. 굴착기작업을 하던 중 토기편과 철기편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목격한 신문배달을 하던 고교생에 의해 신고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발굴단을 놀라게 하는 유물로 말갑옷이 나왔습니다. 이전에도 8개의 유구에서 12령 정도가 나왔으나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완전한 형태였습니다. 말갑옷은 얇은 철판을 이용하여 소형의 찰갑을 하나하나 연결한 것으로 좌우 두 부분으로 분리된 형태였습니다. 마갑총 출토 말 갑옷은 한반도 최초로 머리, 목, 가슴, 몸통 부분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채 발굴된 마갑으로, 그동안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서만 존재가 짐작되었던 한국 개마무사의 실존을 확인해주는 유물로 지난 2020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가야 역사 속에서 항상 강력한 집단으로 가야세계를 이끌어온 아라가야는 일본에게도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아라가야가 고당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백제와 신라의 압박을 이겨내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왜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임나일본부’라는 것이 있어 지금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임나일본부는 왜에서 가야에 파견된 사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나’와 ‘일보’ 그리고 ‘부(府)’의 합성어로 임나는 가야를 가리키고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존재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부’는 ‘미코토모치’를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며 ‘일본부’는 ‘야마토의 미코토모치’로 읽히는데 ‘미코토모치’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되었다가 되돌아오는 일회용 사신으로 일본부는 ‘왜의 사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나일본부는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이란 의미로 『일본서기』에서는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이라 하니 ‘아라가야에 있었던 여러 왜신들’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럼 이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신들은 가야지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교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라에 의해 남가라, 탁기탄, 탁순이 망하자 아라가야마저 몰락한다면 왜의 입장에서는 교역상대국 하나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아라가야의 외교노선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안라국은 백제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은 바 안라일본부가 신라와의 외교활동에 도움을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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