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와 고당회의, 그리고 아라가야 멸망
2023. 7. 16. 07:2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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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는 아라가야가 백제, 신라, 왜 등의 사신을 총청해 국제회의를 연 고당건물터가 발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가야읍 도항리 함안 충의공원 조성부지에서 현장설명회를 갖고 7월말부터 유적을 조사해 온 결과 길이 40m, 폭 16m 규모의 타원형 건물 터를 발굴한 것인데요. 이 건물 터는 해발 20∼40m 구릉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6개의 나무기둥 자리인 중심주혈열이 일렬로 배치되고 그 밖을 34개의 주혈이 다시 타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내부기둥의 지름은 약 70∼80㎝로 이 곳이 주거공간보다는 의례행위나 회의장소 등 당시 아라가야(안라국) 지배계층의 특수용도 건물로 판단한 것입니다. 건물터로 보아선 300~500명을 수용하는 규모라고 하니 과연 국제회의장이라고 할만한 곳입니다. 아마 아라가야는 이러한 건물을 지음으로써 남부가야의 맹주로서 그 위용을 주변국들에게 과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고당건물터와 관련된 고당회의란 무엇일까. 이는 고구려 혹은 당나라와 전혀 관련이 없는 역사용어로 6세기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관련한 역사용어입니다. 529년 3월에 안라국이 주도해 백제, 가야, 신라, 왜가 참가하여 수 개월간 지속된 국제 회의가 있었으니 이것이 고당회의입니다. 이 일은 삼국시대 중반 남부의 세력권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건으로 고당(高堂)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회의를 했다 하여 '고당회의'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역사서가 아닌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사건입니다. 당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나제동맹을 맺는가 한편 백제와 신라는 가야의 소국들에 대하여 그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529년, 반파국(대가야)의 군주였던 이뇌왕이 신라와의 동맹을 위해 신라 김씨 왕실의 사람을 받아 들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배경이 있는데 백제가 반파국 영토였던 기문(현 전북 남원), 대사(현 경남 하동)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 기문을 상실한 반파국은 백제에 대립해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합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안라는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했으며, 백제의 기문 진출로 인해 가야 연맹과 반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야연맹의 갈등을 틈타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고파·포나모라 등 3성을 함락 시켰으며, 이후 북쪽 경계의 5성까지 함락시키면서 가야지역을 잠식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 안라국은 백제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결혼동맹을 맺게 된 신라와 가라,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이었던 왕후는 100여명의 종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반파국에서는 이 종자들을 가야 곳곳에 배치합니다. 이들은 가야입장에서 보면 스파이같은 존재였는데요. 몇 년 후 신라 측에서 비밀리에 종자들에게 신라 의관을 입게 하여 신라의 정치적인 위엄을 가야 연맹에 과시하려하자 이에 가야소국들은 반파국이 신라와 굴욕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탁순국 군주 아리사등이 반파국 왕의 허락없이 종자들을 쫒아내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이걸 빌미로 신라는 탁순국을 공격해서 탁순국의 북경 5개 성과 도가(刀伽)(아마 큰 규모의 제철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임) 등 3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이 일로 탁기탄국이 멸망하고 탁순국도 영토의 반을 상실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가야의 소국들은 반파국을 불신하게 되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결혼동맹으로 촉발된 일련의 일들로 인해 불러온 것이 바로 고당회의입니다. 안라는 안라회의를 통해 신라에게 압박을 가해 탁기탄국을 재건하고, 안라의 국제적 지위를 올려 반파국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소국들이 안라국을 형님처럼 모신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야 말기에 안라국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중략) 이 달에 오구미 게누노 오미(近江 毛野臣)를 안라로 보내 조칙으로 신라에 권하여 남가라(금관국), 탁기탄을 다시 건립토록 했다. 백제는 장군군 윤귀(將軍君尹貴), 마나갑배(麻那甲背), 마로(麻鹵)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를 부순 것이 두려워 대인을 보내지 않고, 부지내마례(夫智柰麻禮), 해내마례(奚柰麻禮)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고당(高堂)을 지어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는 따라 올라갔고, 국내의 대인으로써 미리 당에 올라와 있는 사람도 하나 둘 있었으며, 백제 사신 장군군(將軍君) 등은 당 아래에 가 있었다. 그 뒤로 몇달 동안 두세번 당위에서 모의했는데 장군들은 뜰에 있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
백제가 보낸 사신은 백제 관등 체계 제1위에 해당하는 좌평이었지만 박대당했고, 신라는 처음부터 고위직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백제의 사신이 초대받았음에도 고당에 오르지 못한 것은 백제가 대사지역(경남하동)에 진출하였고 이는 남강을 통해 안라를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회담을 통해 '가야의 대표'임을 선언하는 외교적 성과를 낸 데다 실제로 고령의 대가야를 제치고 가야의 새 맹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안라회의는 백제와 신라에게 있어 안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쯤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후 백제가 안라국의 걸탁성(乞卓城)을 빼앗아 안라국을 자신들 영향권에 복속시키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에 안라는 안라일본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안라는 백제의 진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백제의 성왕은 남가라·탁기탄·탁순 등 이미 멸망한 가야제국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했으나, 백제가 가야지역에 지속적으로 ‘군령성주’를 두는 등 안라지역 진출 의도를 버리지 않자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제국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안라국은 신라·백제와의 외교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자 고구려와 밀약(548년)을 통해 백제를 견제코자 했습니다. 안라국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으나, 백제는 신라 구원병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를 물리쳤습니다. 이로써 안라국의 외교정책은 실패만 계속되었습니다.
계속된 외교실패로 백제와 화친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백제의 간섭을 받게 된 안라는 백제의 군사저 요구를 받아 554년 백제의 편에 서서 관산성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고 신라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가야지역에 대해 병합을 도모하여 560년 즈음에는 아라가야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멸망시기도 논란이 있습니다.
"신라는 아라(阿羅)의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고서 일본에 대비하였다." 『일본서기』 561년
아마도 아라가야가 560년 즈음에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이 기록 때문일텐데요. 파사산(波斯山)의 현위치에 관해서는 미상이지만 파사산은 아라阿羅 즉 안라국(安羅國)에 있던 곳이 분명하므로 신라는 당시 안라국의 일부를 이미 차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는 561년 무렵 일본과 친선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측의 불응으로 실패하고, 안라국의 파사산 지역에서 일본에 대비하는 성을 쌓게 되었고 이 시기에 신라가 안라국으로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라국은 560년 아니면 561년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는 한 역사학자의 주장을 수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가지고 아라의 파사산에 신라가 성을 쌓고 대비했다는 기록을 아라가야가 멸망했다는 기록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함안군(咸安郡)은 법흥왕(法興王)이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아시량국(阿尸良國) (한편 아나가야(阿那加耶)라고도 이른다)을 멸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은 곳이다.’ 『삼국사기』
삼국사기를 보면 법흥왕이 아시량국을 멸했다고 하므로 이시량국은 아라가야이고 법흥왕 재위기간은 514년 ~ 540년입니다. 그러므로 재위기간을 보면 540년 이전에 아라가야가 멸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헌 『대동지지』에는 법흥왕 24년 537년에 아라가야가 멸망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실에서는 우리나라 문헌보다 『일본서기』를 이용하여 아라가야 멸망시기를 기록한 것은 재고해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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