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남부에 있던 나라 탁순국
2023. 7. 18. 19:4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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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에 자리잡은 나라로 탁순국이 있었습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366년 『일본서기』 신공 섭정 46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탁순국의 말금한기는 왜국사신에게 백제 사신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탁순국 사람 과고를 보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 주기도 했습니다.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탁순국을 지금의 창원으로 본다면 마산만은 왜·백제와의 중요한 교통로였을 가능성이었을 것을 봅니다. 그리고 창원을 탁순국을 보는 유적지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등지에 가야고분군들이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364년에 백제 사람 구저 등 3인이 탁순국으로 와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물었지만 바닷길이 멀어 풍랑이 험하므로 큰 배를 타고 가야한다고 말하니 그들이 돌아갔다’ 『일본서기』
이러한 기록은 당시 탁순국이 왜와 교류가 활발하였고 백제와 왜의 교류를 주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신공기 기록은 곧이 곧대로의 역사로서는 신빙성이 낮고, 국내 사학계에서는 '주체교체론'+'이주갑인상'으로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의 남방 경략의 주체를 근초고왕에서 신공왕후로 바꿔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탁순국왕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거절했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수집하여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가야 지방의 각 소국과 교섭을 시도하는 등 사전 정지 작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369년 근초고왕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곱 나라를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에도 탁순국으로 추정되는 '탁국'을 포함해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5세기에 대가야가 성장하고, 개로왕이 살해되고 수도를 고구려에 빼앗기는 등 혼란에 빠진 백제의 변방 섬진강 유역을 대가야가 차지하면서 탁순국도 이때 대가야가 주도하는 가야세력에 일단 가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탁순국은 남해안과 동해안을 끼고 있어 왜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교류가 많았고 서쪽으로는 아라가야(함안), 동쪽으로는 가락국(김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에는 대가야가 있었습니다. 한편 창원시 도계동에서 출토된 화염문투창고배는 5세기 전반 함안지역의 독자적 형식의 토기로 일본의 긴끼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탁순국이 왜와 교역이 활발했고 탁순국을 통해 물건이 통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탁순국은 6세기 전반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라왕(加羅王)이 신라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음 여자를 보낼때 100인을 아울러 보내 그녀의 시종으로 삼았으므로, 받아들여 여러 현에 나누어 배치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였다. 아리사등은 그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었다고 성내며 사자를 보내 돌아가게 하라고 시켰다. …’ 『일본서기』
이 때 아리사등을 탁순국의 마지막왕으로 보는데 아리사등이 이러한 지시를 했던 이유는 신라가 대가야와의 동맹을 이용해 김해지역으로 진출을 노린다면 김해와 가까운 창원을 근거지로 한 탁순국도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능말다간기와 아리사등을 동일인으로 보는 설을 따를 경우, 신라의 본격적인 침입이 두려워 529년 일본까지 직접 넘어가 지원군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탁순국은 아라가야와 협력했는데 아라가야 입장에서는 백제가 하동지역으로 진출하였으므로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아라가야가 주최한 고당회의에 탁순국도 적극적으로 동조했습니다.
사실 탁순국은 우리나라나 중국 측의 사서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서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에 의하면 탁순국은 백제와 왜 사이에 있어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은 워낙 간략하여 탁순국의 존속연대와 위치에 대해 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경남 창원설, 함안 칠원설, 밀양설, 의령설, 대구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탁순국의 칠원설같은 경우는 정작 가야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안 칠원면 오곡리 유적에서 고성과 창녕 양식의 토기가 출토되었으나 오곡리유적은 5세기 중후반의 것으로 여기서 출토된 화염문투창고배는 의령과 진주지역에서도 출토되었으니 함안 양식의 유물이 그 일대에 뻗쳤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함안의 세력범위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지역이 여타 지역과 상호교류의 증거로 여겨질 수는 있으나 탁순국의 중심지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칠원설의 치명적인 약점은 함안의 읍내하고 너무 가깝다는 문제가 있으므로 이에 나온 것이 바로 창원탁순국설입니다. 이곳은 함안과 경계지대에 있는 곳으로 구례산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료에 따라 유력한 곳으로 창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두 이야기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함안의 동쪽의 창원과 함안 서북이냐는 차이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탁순국에 자리에 대해 대구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이 주장은 탁순과 대구와 소릿값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출발한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보충하는 설명으로 탁순국은 대구 달성의 일본식 표기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들, 결정적으로 갸아식의 무덤양식 혹은 가야색채를 지닌 유물이 대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대구에 탁순국이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없을 것입니다. 6세기 초에 탁순국이 대구에 있었다면 신라의 영역이 너무 작아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4세기의 일을 6세기초의 일로 잘못 적은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대구에 탁순국보다는 발음이 더 비슷한 탁국이 더 어울릴 것입니다. 이후에도 진해 웅천에 탁순국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도 나왔지만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 약점입니다. 탁순국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 힌트가 되는 것은 바로 대강수(大江水)가 나오는데 이를 대부분 낙동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남강을 포함한 의령탁순국설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이후에도 탁순국의 위치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구례산 주변의 여섯 개 성을 탈환하면 탁순국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사료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탁순국의 위치를 정하는 데는 쉽지 않습니다.
2년 여름 4월 (중략) 성명왕 (백제 성왕)은 "(중략)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중략)"고 하였다. 『일본서기』
신라는 김해 다음으로는 탁순으로 진출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에 따라 남가라가 몰락한 532년, 그리고 『일본서기』 541년의 기록에서 이미 탁순국이 망했다고 기록하니 아마 탁순국은 532년에서 541년 사이에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위와 아래가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어서 왕이 종속되길 원하여 망했다고 하니 내부분열로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해 왕이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사비회의에서 성왕은 신라가 '약속을 어기고 탁순을 멸망시켰다'라고 말했는데, 백제와 신라 모두 탁순을 일종의 완충지대로 두는 상태로 대치하다 신라 측에서 먼저 수를 썼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왕의 발언은 백제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금관과 탁순의 멸망은 나머지 남아있는 가야사회에 큰 안보 불안과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다만 탁순국주가 신라에 자진 투항함으로써 탁순국도 자진 투항한 김해 지역처럼 다른 지역에 비해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屈自郡)으로 삼았으며, 757년(경덕왕 16)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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