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에 비화가야가 있었다
2023. 7. 19. 17:5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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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의 일입니다. 도굴되지 않은 가야시대 고분에서 출토돼 주목 받은 ‘비화가야 금동관’이 순수 구리에 금을 도금한 것이며, 신라의 하사품이 아니라 비화가야의 자체 제작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금동관 안팎에서 모직물 등 고대 직물도 확인되었습니다. 가야가 여섯 개의 가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우리에게 친숙한 가야는 금관가야나 대가야일 것입니다. 하지만 비화가야는 생소한데요, 그런데 ‘비화가야 금동관’은 가야연맹의 하나로 5세기 중반~6세기 전반 경남 창녕 일대를 근거지로 한 비화가야 시기의 최고 지배층 무덤에서 2020년 출토된 것입니다. 발굴 당시 63호분은 일제강점기 이래 대다수 고분들이 도굴당한 것과 달리 이례적으로 도굴 흔적이 없어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당시 발굴조사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해 귀걸이, 유리구슬 목걸이, 은제 허리띠와 반지 등 장신구들이 나왔습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비화가야 금동관’은 높이 약 22㎝, 둘레 길이 47㎝로 순수한 구리 표면에 금·은 합금을 수은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습니다. 수은아말감 기법은 고대 도금방법의 하나로 귀금속을 수은과 결합시켜 물체에 바른 뒤 수은을 증발시켜 도금하는 방법입니다. 금동관의 ‘출(出)’자형 세움장식은 앞뒷면 모두를 도금했지만 몸체(관테)는 바깥 면에만 함으로써 도금 부위를 최소화하면서 시각적 효과는 최대화했습니다. 특히 금동관은 신라의 하사품이라기보다 창녕 일대 비화가야 내부에서 자체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신라의 금동관들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지만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없는 등 관의 형태를 간소화·변형시킨 것으로, 5~6세기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 신라 금동관들과 비교해 도금층이 얇고 도금 후 열처리 기술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편 지난 2022년에는 창녕군은 남지읍 고곡리에 위치한 '구진산성' 발굴조사 끝에 당초 알려진 조선시대 산성이 아니라 5세기 비화가야의 유적으로 밝혔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9개의 진을 펼쳐 왜군을 물리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산성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창녕군은 이번 발굴조사에서 성벽 기저부에 석축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로 토제(土堤)를 활용한 가야시대 토목기술이 확인됐고, 성벽 내부에서는 5세기대 비화가야의 토기편들이 출토됐다고 밝혔습니다. 지리적으로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고 있어 삼국시대 방어 거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두 유물이 발견되 곳이 바로 창녕은 비화가야로 보는데요. 한편으로는 신라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라 창녕이 고대시기에는 신라에 속해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창녕이 가야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신라에도 워낙에 근접했던 지역이라 두 국가의 특징을 한 유물이 나와서 그런 것 같은데요. 한편으로는 4세기 이전의 가야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창녕의 여러 유적에서 신라색채의 유물이 나온다는 것은 과연 창녕에 있던 국가에 대해 비화가야란 명칭을 붙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창녕에 대해 가장 이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화왕군은 본래 비자화군이다(비사벌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설치하여 하주라 하였으며 26년 주를 폐했다.’ 『삼국사기』
이후의 창녕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만 이 지역이 본래 가야지역이었다는 명확한 사료가 없어 후대인들은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창녕이 비화가야라는 것에 대해 부정했지만 이보다 앞선 사료인 『본조사략』에서는 창녕지역을 비화가야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3세기 중국 『삼국지』에는 불사국은 진한의 소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불사국은 진한의 한 나라였으나 이후 예를 들면 포상팔국전쟁 이후에는 가야권으로 편입되었거나 아니면 애매한 거리 탓에 신라와 가야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녕에서 발굴되는 유물 유적들을 보면 대부분 5세기 이후의 것으로 신라색이 강하다고 합니다.
창녕을 부르는 국명과 지명은 다양합니다. 『삼국지』의 불사국, 『삼국유사』의 비화가야를 비롯, 여러 서적에서 비지국, 비자발국 등의 나라이름이 있었으며 지명도 비자벌, 비자화, 비사벌, 비지 등으로 불린 것입니다. 여러 명칭으로 불리지만 대부분 비슷한 음을 가지고 잌ㅅ는데요. ‘빛벌’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과거 불사국이 비사벌국 혹은 비자화, 비화가야로 발전하였으며 확실하지는 않지만 진흥왕 16년(555년)에 비사벌에 완산주를 두었다고 하였으므로 신라 편입 이전에는 ‘비사벌’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대에는 비화가야보다는 ‘비사벌’로 불렸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창녕지역은 서쪽과 남쪽이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농업에 유리한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동강이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고 비화가야는 이를 활용한 생산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치 때문에 가야 나라들 사이에서는 물론 신라입장에서도 이 창녕을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곳에는 고분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숫자가 경주 다음으로 많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창녕읍 교동, 송현동고분 주변에 화왕산성, 목마산성, 계성면 사리, 계남리고분 주변에 신당산성, 계성토성은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고분도 고분이지만 창녕지역에는 청동기 시대 이래 다수의 지석묘가 확인되었습니다. 지석묘사회는 큰 국가 체제의 앞단계로 보는데요. 자하천 주변의 송하 말흘리 지석묘군을 포함한 여러 지석묘 유적은 정치세력의 흔적으로 불사국과 비사벌의 음이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창녕 지역에 변진소국인 불사국이 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창녕에 불사국이 있었다면 신라와의 접점에 있던 국가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로국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들에게 쉽게 통합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커 나갔을 거라 보고 있기도 하는데 앞서 이야기한것처럼 창녕에서 발견되는 유물 신라의 색채가 강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신라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야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녕형 토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 곳은 나름의 특징을 유지한 곳인데요. 더러는 이러한 창녕에 대해 5세기까지 신라나 가야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제시되는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여부를 떠나 창녕지역에 위치했던 고대국가의 문화나 특성에 대해 극명하게 설명해 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창녕의 향토사학자들과 연구단체들은 창녕을 비화가야의 고도(古都)가 틀림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교동·송현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의 묘제가 모두 가야묘제로 되어 있으며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220여 기이고 계성고분군이 200여 기라 하는데 이 중에서 신라묘제는 단일 기인 교동고분군 제12호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중 주분인 제7호분과 89호분, 91호분에서 나왔다는 왕관은 금동관(金銅冠)으로 가야왕관이라는 겁니다. 순금으로 굽이 높다란 신라왕관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로 교동·송현동이나 계성의 고분출토 유물 중 장신구, 무구류(武具類), 마구(馬具), 철기, 토기가 모두 가야유물이다. 특히 경질토기(硬質土器) 가운데 유개고배(有蓋高杯)의 뚜껑 꼭지가 좀 높은 것은 창녕토기의 특징을 뚜렷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역의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환두대도임을 말하고 토기는 신라토기보다는 고식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창녕이 가야임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문제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확신을 갖기 힘들다고 합니다.
한편 이곳에 있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는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대가야 멸망하기 1년 전인 561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즉, 비화가야의 멸망은 신라의 팽창 때문이었는데요. 555년에 하주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비사벌국은 신라에 편입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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